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 (상)  _  2008.4.21
의미심장한 얘기를 하나 들리겠다. 필자의 평생 功力(공력)을 담은 선물이라 생각하셔도 좋으리라.

이 글은 행복하고자 노력하는 분들에게 그 길을 안내하기 위함이다. 죽은 자의 행복을 위한 것이 고대 이집트의 '死者(사자)의 書(서)'라면 이 글은 산 자의 행복을 위한 '生者(생자)의 書(서)'라 하겠다.

사람이 살면서 소망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평생 관찰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담해주면서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속내를 지켜보았다. 또 필자의 지난 날 바람을 스스로 돌이켜보았으며,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무엇으로 즐거워하고 아파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널리는 萬卷(만권)의 책을 통해 사람이 무엇을 소망하면서 살아왔는가를 음미해보았다.

그 결과, 살면서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잠정적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라 표현한다.

첫째는 '욕망하는 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존재하고픈 나'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넘어서고픈 나'가 있다는 것이다.

약간 어려운 말로 들리는가?

언제나 그렇듯이 필자는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읽어서 이해가 되지 않을 글은 아예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고 따라오시길 바란다. 이 글을 다 읽은 뒤에는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편안해질 것이다.

다시 얘기로 돌아와 보자.

사람은 먼저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불행해진다. 욕망은 우리가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상 충족하고자 애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험한 음식이라도 배가 고프면 꿀맛이다. 하지만 먹는 것이 그럭저럭 해결되면 좀 더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프다. 배에 기름이 끼면 그냥 영양분이 아니라, 좀 더 신선하고 몸에 좋은 유기농식이나 아니면 남들이 좀처럼 먹지 못하는 珍味(진미)를 먹고프다.

하지만 우리 몸의 감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면 급속도로 둔감해진다. 그래서 먹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로써 '욕망하는 나'의 일부인 '먹고픈 나'는 충족된 것이다. 그만큼 행복해진 것이다.

먹는 것이 충족되어도 그것은 우리가 지닌 생래적 신체적 욕망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다 알고 계시듯 말이다.

배가 부르고 나면 몸을 편안하게 하고 해주고 싶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실컷 먹고 살아도 쉴 틈이 없는 입장이라면 그 또한 사람 살 짓이 아니다. 누울 때 눕고, 일어나 걷고 싶을 때 걸어야 하는 욕망이 있다.

몸을 편안하게 해주고자 하는 욕망도 들여다보면 정말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있다.

더울 때는 서늘한 곳에 있어야 하고, 추울 때는 따뜻한 곳에 거처해야만 몸이 즐겁다. 소음이 많으면 그 또한 피하고 싶고, 너무 적막하면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고 싶다.

앞이 막히면 탁 트인 곳에 살고 싶고, 너무 비좁으면 좀 더 넓은 곳에 살고 싶다. 콘크리트로 가득한 도심이라면 나무가 많은 정원 있는 집에서 살고 싶고, 공기가 탁한 곳이라면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몸이 생래적으로 지닌 욕망에는 사실 끝이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눈의 욕망도 있지만 귀의 욕망도 있고 혀와 코, 만지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여기서 필자는 그런 욕망들을 단속하고 억지로 눌러야 한다고 미리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말하려 한다고 지레 짐작하시지 말기를.

그런 욕망을 억눌러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가능하다면 마음껏 욕망해야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듯이, 가능하다면 실컷 더 욕망에 부합하는 쪽으로 사람은 저절로 다가서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 말은 남들이 다홍치마를 입고 다니는데 내가 다홍치마를 입지 못한다면 그 또한 불행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행복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껏 먹고 산다 해도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마음껏 욕심을 부려보자. 욕망을 참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니.

눈을 즐겁게 해주려면 그 또한 많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저기 좋은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고, 나라가 제법 발전했으니 이국적인 풍경을 찾아 프랑스도 가고 베네치아도 가고 중국의 여러 관광명소들도 찾아다닌다.

그 또한 처음에는 가 본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멋진 스위스의 호숫가 마을에 있는 아담한 호텔에서 우아하게 며칠 보내고 싶은 마음도 들고, 남들이 가보지 못한 스코틀랜드의 고성에서 멀리 보이는 겨울 구름을 보며 감상에 젖어들고도 싶은 것이다. 누가 막으랴, 그대의 욕망을.

처음 비행기를 타보면 구름 위 세상이 그토록 아름답겠지만, 몇 번 타보면 삼등석이 아니라 최소한 이등석에는 앉아야 하늘 여행이 즐거운 법이다. 배도 마찬가지, 기차도 마찬가지, 자동차도 마찬가지이다.

가능하다면 인상 잔뜩 찌푸리고 있는 택시를 타기 보다는 전용기사가 모는 6기통 엔진의 쾌적한 자가용 승용차에 타고 싶은 것이다. 누가 그대의 욕망을 꾸짖을 수 있으리.

욕망은 이처럼 다양하고 가지 수도 많지만 그렇다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란 우리의 욕망을 일으키는 감각은 생각보다 급속도로 만족에 도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욕망은 자제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누림을 통해 만족시켜버릴 성질의 것이다. 다시 말해 포만에 도달할 때까지 욕망하라는 것이 더 솔직한 말일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욕망이 있다. 성욕이다.

사실 성욕은 암수를 통해 생식하고 번식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지닌 본능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 번식할 때가 되면 누구나 성욕에 눈을 뜬다. 바보도 성욕을 지니고 천재도 지닌다. 그러니 보통 사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모두 생명체이니까.

그리고 이 성욕이란 것 또한 워낙 강력해서 끊임없이 채워야 한다. 거의 일용할 음식과도 같다. 그렇기에 남자들은 흔히들 어떤 여자와 섹스를 했느냐하는 표현을 그녀를 먹었느냐는 비속한 표현을 쓴다.

비속하지만 진솔한 표현이다. 섹스의 본질적 표현은 남자가 여자를 먹고 여자가 남자를 먹는 것이다. 당신을 '먹고 싶어'라는 말처럼 노골적이고도 진솔한 말이 달리 어디 있는가.

그리고 섹스란 분야 또한 음식과 같아서 처음에는 배가 부르면 그만이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채워지기 시작하면 다양한 진미를 맛보고픈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같은 음식이라도 그릇이 다르고 장소가 다르면 새로운 맛이 나듯이, 연인들과 부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를 시도한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변신해도 같은 음식에서 오는 싫증, 이른바 食傷(식상)할 때가 되면 슬슬 다른 음식을 찾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보면 거기서 거기이다.

그 결과 이혼도 하고 바람도 피우고 더블 데이트도 즐긴다. 사실 남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남녀의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식과 표현이 약간 다를 뿐.

누가 막으랴, 나의 잠자리 결정권을 침해함은 위헌이라는 모 여배우의 항변처럼. 가능하다면 한계까지 밀어붙여야지.

욕망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끈질기게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끝이 있고 한계도 있다. 다만 너무 많고 수준의 차이가 많아서 끝이 없어보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리고 우리가 지닌 다양한 욕망의 모든 한계를 경험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현실적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제한은 '돈'이라고 하는 말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자들이 돈이 아주 많은 다른 남자를 부러워하는 것을 가만히 분석하면 이런 부러움이다.

저 자식은 돈이 많으니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수시로 좋은 음식과 좋은 장소를 돌아다닐 것이며, 어디를 가도 허리를 굽히는 놈들만 상대하면서 마음에 끌리는 여자는 죄다 제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니 얼마나 좋을까!

필자가 여자가 아닌 까닭에 여자가 돈 많은 여자를 부러워할 때 그 구체적인 속내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와 비슷한 부러움과 시샘을 지닐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우리의 엄청난 욕망들을 가로막는 제약은 바로 '돈'이다. 오죽하면 그 원수, 아니 웬쑤같은 돈이라 할까.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웬쑤를 갚아야지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모든 과거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변함없는 비원이다.

그래서 원래 '선량'한 인간은 '돈'으로 표현되는 풍요로움으로의 통행증을 얻고자 열심히 박이 터지게 투쟁하고 있다. 그러니 이 싸움을 누가 막으랴!

공자가 막았고 예수가 막았으며, 석가모니와 무함마드가 막았지만 역부족일 수밖에.

오늘은 '욕망하는 나'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에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알고 보면 욕망의 충족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한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행복으로 가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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