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그 화려한 삶의 꿈  _  2008.4.30
앞서의 '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을 잘 읽으셨는지, 그렇다면 오늘은 九雲夢(구운몽)을 빌어 삶의 행복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은 사람이 살면서 누리고 성취할 수 있는 행복의 極限(극한)을 보여준 소설이다.

  이 소설은 부귀영화는 덧없는 것이니 참된 깨우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金剛經(금강경)의 우화적 설법과 같고 法華經(법화경)의 化城喩品(화성유품)과 같다.

  주인공 성진 스님의 스승 육관대사의 법명은 금강경의 네 구절로 된 깨우침의 노래, 四句偈(사구게)의 핵심 요지를 딴 것이다.

  스승 육관대사에서 六觀(육관)이란 이 세상 보기를 夢幻泡影露電(몽환포영로전), 즉 꿈과 같이, 헛것과 같이, 포말과 같이, 그림자같이, 아침 이슬 같이, 순간에 지나가는 번갯불 같이 보라는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구운몽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문학적 속임수일 뿐이다. 정작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흥미와 재미는 화려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과정 자체에 있고, 그렇기에 소설 구운몽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진에서 인간 세상에 환생한 양소유를 보라.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천하의 드문 문장이요, 시험 쳤다 하면 장원급제, 엎어지는 곳마다 콧대 높기 그지 없는 천하미녀와 절세가인이 받쳐준다. 게다가 음악에도 고금에 드문 명인의 경지에 이른다.
  
  조정에 나간 뒤로 황제는 그가 한시라도 곁에 없으면 좌불안석이니 총애는 하늘을 찌르고, 역도들이 난을 일으키지만 일필휘지 써내니 알아서 엎드린다.
  
  그래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매한 지방 세력들이 있어 스스로 병권을 한 손에 쥐고 출정하니 武勇(무용) 또한 천하에 떨친다. 이름만 들어도 천하가 떠들썩하니 名震天下(명진천하)에 부족함이 없다.
  
  다시 들어와 一人之下 萬人之上(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니 평생 복록과 부귀가 다함이 없다. 이어 만났던 절세가인들을 모두 거두어 처첩으로 삼아 많은 자식을 두니 쾌락이 끝이 없다.
  
  이 얼마나 화려하기 그지없는 꿈인가! 절대지존의 럭셔리!
  
  부귀영화를 덧없다 하는 것은 사실 웃기는 얘기다. 누려본 뒤에야 덧없음을 깨우칠지언정 세상현실은 부귀영화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떡을 맛없다 함은 가소로운 얘기가 아닌가.
  
  배 고프고 술 고픈 사람에게 과식하면 어떠니 과음하면 저떠니 하는 것은 부아만 더할 뿐이다. 일단 먹고 마신 연후에 잔소리를 해도 들을 것이 아닌가.
  
  구운몽의 우선적인 매력은 부귀영화의 재미부터 실컷 대리만족시켜 준다는 점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과정은 저번 글 '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에서 앞의 두 개, 즉 '욕망하는 나'와 '존재하고픈 나'를 성취하는 과정이다.
  
  그런 연후에 소설의 말미에 가서 높은 깨달음까지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넘어서고픈 나' 즉 神聖(신성)의 경지까지도 얻는 과정인 것이다. 이로서 양소유이자 성진 스님은 삶의 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 모두를 그것도 최상급으로 성취한 것이다.
  
  물론 소설은 실컷 즐긴 부귀영화를 마지막에 가서는 부정하고 신성한 진리의 높음을 더 높이는 듯한 몸짓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짐짓 부려보는 몸짓이며 트릭일 뿐, 실은 세 가지의 '나'를 모두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속적이고 平凡(평범)한 것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끝에 가서 종교적 非凡(비범)의 가치에 이르는 것 같지만, 실은 두 가지 모두를 긍정하고 있으니 구운몽의 탁월함은 이 점에 있다.
  
  세속적 재미만을 얘기하면 통속소설이고, 절대 진리만을 얘기하면 高踏(고답)적이고 재미없는 순수문학 내지는 철학 교설이다.
  
  그러나 구운몽은 통속과 고답을 아우르고 있으니 이야말로 非平凡非非凡(비평범비비범)의 어느 경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해서 걸작인 것이다!
  
  다시 말해 구운몽은 九色夢(구색몽)이기도 하다.
  
  김만중의 문학적 기교와 철학적 깊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주인공의 이름 양소유에서 소유는 莊子(장자)의 '逍遙遊(소요유)' 편의 의미를 땄다.
  
  소요유란 천지자연에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유로이 노니는 경지이며, 장자 철학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필자가 글을 통해 끊임없이 얘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렇게 살기 위해 필자가 느낀 바는 이렇다.
  
  아무 것에도 걸리지 않으려면 '걸림'을 많이 겪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많이 다치고 엎어져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선배 말과 어른 말을 액면 그대로 듣는 자는 늘푼수가 없다. 다만 들어두면 나중에 가서 아, 그렇구나 하고 삶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충고와 금언이란 한 귀로는 듣되 한 귀로는 흘려야 하는 것이다. 아예 듣지도 않는 자 미련한 자이고, 너무 받아들여도 '범생이'를 면치 못할 것이다.
  
  서포 김만중도 소설 속의 주인공 '양소유'로 하여금 실컷 놀게 한 다음에야 꿈에서 깨어나는 형식을 통해 수도승 '성진'으로 하여금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는 경지로 들어서게 만들고 있다.
  
  구운몽은 실로 '디테일'이 풍부한 소설이라 동양 인문학에 대한 소양이 깊어지면 더욱 더욱 재미가 나는 소설이다. 동양의 여러 故事(고사)가 담겨있고 시문학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담겨 있어 구운몽을 제대로 註解(주해)하려면 책 몇 권은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조선 시대, 교양이 부족한 일반 서민들이 읽어도 즐거웠을 것이니 소위 대중성도 있는 작품이고, 문자깨나 섭렵한 교양인에겐 도처에 동양학의 빛나는 결정체들을 심어놓아 운치를 살렸으니 작품성도 탁월하다.
  
  유불선 三敎(삼교)가 전혀 무리 없이 버무려져 있는 점 또한 걸작이다.
  
  격물치지 치국평천하의 유교적 이상과 소요유의 莊子(장자)적 미학, 그리고 금강경의 세상 보는 법이 글 전편을 통해 서로 상충하지 않고 잘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구운몽을 조선시대 문학의 최고봉이자 더 나아가서 한일중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학의 白眉(백미)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구운몽은 그리고 '행복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란 무엇인가를 문학적으로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은 조선 숙종 때의 인물이다. 귀양 가서 죽은 것을 보면 성미도 상당히 까칠했었나 보다. 自負(자부)가 크고 당대의 문장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남쪽 바다,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앞 바닷가 섬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憤死(분사)하니 그냥 그곳에 묻혔다.
  
  얼마 전 남해로 봄나들이 갔다가 지나는 길에 그 섬이 보였다. 푸르고 눈부신 하늘 아래 흰 물결 일렁이는 그 섬을 바라보면서 고인의 모습을 그려보고 명복을 빌었다.
  
  서포 김만중은 실로 天下才子(천하재자)였어라!
  
  (저번 글에 대한 댓글을 보고 답하려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삶의 연륜이 쌓이면 모두 절로 깨치게 될 것이니. 그저 두 가지 점에 대해 답을 하고자 한다.
  
  먼저, 세상은 부단히 추하기에 부단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연꽃이 추한 진흙탕에서 피어나듯이 말이다.
  
  다음으로 죽음에 대한 초월, 그를 통한 불멸은 죽지 않거나 죽은 다음에 또 다른 무엇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즉 극락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답을 할 수 없는 죽은 자만이 아는 것이라 우리의 삶 속에는 없는 것이다.
  
  초월이란 것은 죽음이라는 절대 제약을 수용함으로써 소중한 삶의 시간들을 보다 알차게 누려야 함을 우리가 깊이 자각하게 된다는 점과 때로는 누구나 추구하는 부와 권세를 넘어서는 가치지향을 통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이자 정신이라는 얘기이다.
  
  초월과 불멸을 사후의 명예라고 여기면 착각이다. 사후든 생전이든 명예는 '존재하고픈 나'에 속하는 것이고, '넘어서고픈 나'에서 말하는 초월은 명예와는 또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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