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자를 읽다가 조조를 떠올리다  _  2008.7.7
적잖이 東西古今(동서고금)의 책들을 읽었지만 십 수 년을 읽어도 새롭게 깨침을 얻는 책으로서 淮南子(회남자)가 있다.

  장마, 젖은 날에 다시 읽다보니 문득 曹操(조조)가 생각났다. 삼국지의 조조 말이다.

  필자가 읽고 있는 회남자를 비롯하여 무수한 고전들은 조조가 없었다면 어쩌면 없어졌거나 남아있어도 수수께끼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조, 그를 두고 간특하다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난세를 치세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을까.

  조조는 兵略(병략)에 능했을 뿐 아니라, 대단히 박식하여 詩賦(시부)와 음악, 음양오행과 여타 方術(방술) 등에 조예가 깊었으니 문무를 모두 겸비한 역사상 실로 보기 드문 걸출한 군주였다.

  조조는 최대 라이벌인 원소를 격파하고 권력을 잡자 세 번에 걸쳐 널리 현인들과 인재들을 초빙하여 일대 문예부흥을 일으키고 세상을 안정시켰다.

  이를 建安文學(건안문학)이라 하는바, 이는 당시의 年號(연호)였던 '건안'을 딴 것으로서 중국문예사에 있어 하나의 찬연한 황금기로 여겨지고 있다.
  
  세 차례에 걸쳐 인재를 초빙한 것은 때가 후한 제국 말기,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 일대 혼란과 전란의 시기였기에 인재들이 선뜻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까닭이며 마침내 조조의 문치 정책이 확고함을 확인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예와 학술이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조조는 무력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문예에 밝았기에 文治(문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던 영명한 통치자였음을 말해준다.
  
  건안문학은 소위 建安七子(건안칠자)로 불린 일곱 사람과 시문에 뛰어난 조조와 그 아들, 조비와 조식 등 三曹(삼조)가 당시 새 수도였던 업'에서 대략 20 년에 걸쳐 왕성한 문예활동을 했던 것을 말한다.
  
  이 무렵 詩歌(시가)는 다섯 글자로 한 구를 만드는 五言詩(오언시) 양식이 확립되었으며, 시의 내용도 그간의 교화 일변도에서 각자의 강렬한 개성을 서슴없이 노래하는 새로운 경지로 진일보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란을 거친 터라 삶의 덧없음과 허무, 그럼에도 넘쳐나는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과 같은 복잡하고도 다양한 정서들이 반영되기 시작했던 까닭이다.
  
  이에 대해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문학이론서인 '문심조룡'을 보면 다음과 같이 건안문학을 평하고 있다.
  
  "당시의 글을 보면 언제나 慷慨(강개)한 것을 좋아했다. 난리를 겪으며 민심이 흉흉하고 원망이 쌓였지만 반대로 문장은 뜻이 깊고 빼어났다."
  
  詩文(시문)에 반영되기 시작한 삶의 허무성과 낭만성, 연민과 강개 등의 감정은 훗날 唐詩(당시)에 이르러 중국 시문학은 물론 세계 문학사에 있어 한 절정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시선 이백도 건안문학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으며 자신의 시중에서 '봉래문장건안골'이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건안문학을 建安骨(건안골)이라 했던 것이다. 골이란 뼈를 말한다. 또 骨氣(골기)라는 단어도 있다.
  
  건안문학은 얕은 정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골수에서 나온 것이며 아울러 뼈는 근육보다 강한 것이니 그만큼 강개하고 씩씩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울러 건안문학은 訓詁學(훈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교양 꽤나 있어 보인다 싶은 젊은 사람에게 '훈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그거 후진 거 아닌가요? 자구해석만 하는 비창의적 학문이라 들었는데요'라 한다.
  
  참 어이가 없는 얘기, 실소를 금치 못한다.
  
  서구의 르네상스라 하면 대충의 의미는 알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단테와 초서, 세르반테스로 이어지는 문예부흥 시대를 서구인들은 고대와 근대를 이어준 대단한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도 르네상스라 하면 잘은 몰라도 일단 훌륭했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르네상스란 문예부흥을 뜻한다. 이는 '옛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새긴다'는 의미인 訓詁(훈고)와 동일하다.
  
  건안문학 시대의 훈고학은 따라서 중국 고대 문학과 사상의 르네상스였다. 다만 서구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부활시켰고, 훈고학은 앞서의 춘추전국과 秦漢(진한)시대의 여러 고전들을 부활시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시로서 이미 수 백 년 전에 만들어진 유교와 도가, 제자백가의 학설을 담은 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유실되거나 또 다양한 해석, 즉 구구각각의 주장이 나와 도무지 고대 경전들이 무슨 말과 의미를 담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에 마융이나 정현, 그리고 삼국지의 유비 스승이었던 노식 등의 인물들이 나와 여러 경전의 의미를 정리하고 통일했던 것이다.
  
  훈고학은 그래서 先秦(선진)의 고대 학문을 후대로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조조는 정권을 잡자 이런 학자들을 초빙하여 안정된 생활기반을 조성해주어 훈고학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회남자 역시 이런 후원 덕분에 수수께기 책이 되지 않고 후세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흩어져있던 회남자를 다시 모아서 그 문구들의 의미를 풀이하고 주해를 단 이는 바로 '노식'에게 회남자를 배웠던 '고유'라는 학자였다.
  
  회남자를 주해한 고유는 책의 서문에서 조조의 부름을 받아 벼슬을 살면서 10 년간에 걸쳐 주해 작업을 했다고 써놓고 있다.
  
  고유가 주해를 단 덕분에 회남자는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되어 오늘날 고대사상과 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실로 소중한 학술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병법에 밝았던 조조는 자신 스스로가 늘 손에 들고 보던 '손자병법'을 읽기 좋게 정리하여 13 편으로 만들었으니 이 책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대하고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손자병법'임도 밝혀둔다.
  
  회남자는 어떤 면에서 노장만이 아니라 음양오행사상의 핵심을 전하고 있는 경전이다. 방술에 밝았던 조조의 은혜가 서린 책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메디치 가문을 빼고 생각할 수 없듯이 건안문학이라는 동양사상의 르네상스 역시 조조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비오는 날 책을 읽다가 새삼 조조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시인이었던 조조가 남긴 '단가행'이란 시 한 편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마친다.
  
  短歌行(단가행)이란 '인생길을 가면서 부르는 짧은 노래'라는 의미이다.
  
  술을 앞에 대했으니 마땅히 노래 불러야 하리, 삶은 얼마나 되리
  (對酒當歌 人生幾何)
  마치 아침 이슬과 같건만 살아온 날들은 어려움이 더 많았네
  (譬如朝露 去日苦多)
  슬픔이 더욱 깊어지니 근심은 잊기 어렵구나
  (慨當以慷 憂思難忘)
  어떻게 이 근심을 풀리오, 그저 술이 있을 뿐이라네
  (何以解憂 唯有杜康)
  
  -----------중략----------
  
  산은 높아짐을 저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어짐을 마다치 않으니
  (山不厭高 海不厭深)
  주공은 입안의 것도 뱉었기에 천하 민심이 돌아왔다네
  (周公吐哺 天下歸心)
  
  마지막 부분은 해설이 조금 필요하다.
  
  산이 높아짐을 저어하지 않고 바다가 깊어짐을 마다치 않는다는 것은 산과 바다처럼 거창한 인물이 되고자 한다는 자만이나 자부심을 표한 것이 아니다.
  
  당시 혼란기라 조조에게 반대했던 다양한 세력들과 인사들이 있었던 바, 비록 마음과 뜻이 맞이 않아도 천하를 평안케 하려면 모두 받아들여 통합을 이루겠다는 조조 스스로의 결의를 뜻한다.
  
  그리고 周公(주공)이 입안에 씹던 음식도 뱉었다는 故事(고사)는 이렇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殷(은)을 멸한 周(주)나라의 개국공신으로서, 무왕이 일찍 세상을 뜨자 자신이 권좌에 오르지 않고 무왕의 어린 아들을 보필하였다.
  
  주공은 성심껏 정사에 임하여 귀한 인재나 비중 있는 인사가 불시에라도 찾아오면 먹던 음식마저도 뱉어내고 맞이하는 성의를 보였기에 천하의 세력들을 주나라로 모이게 할 수 있었다는 얘기로서 조조 역시 주공의 자세로 정치에 임하겠다는 것을 표방한 것이다.
  
  조조는 큰 인물이었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