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樂(예악)에 대하여  _  2008.7.2
저번이 346 회였으니 종착역이 멀지 않은 셈이다, 360 회로 완결이라, 최근의 내용들에서 마무리의 흐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글 "서쪽 문을 나서면..."에서 '양관삼첩'을 빌어 음악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나름의 의도가 있었으니 禮樂(예악)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었다.

  예악이 무엇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 글을 인용해본다. 禮記(예기)에 보면 "大樂與天地同和, 大禮與天地同節"이란 표현이 있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大樂(대악)은 천지와 더불어 그 和(화)를 같이 하고, 大禮(대례)는 천지와 더불어 그 節(절)을 같이 한다."

  여기서 和(화)란 것은 어우러짐이고 節(절)이란 자연의 질서를 말한다.

  그렇기에 和란 음양이 상생과 상극을 통해 調和(조화)를 이루어냄을 말하는 것으로 음양오행의 지향하는 바이고, 節이란 사시사철의 순행을 통한 천지자연의 정연한 질서 또는 차례를 말함이니 음양오행의 실제 운행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禮樂은 和와 節을 위함이니 이는 음양오행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의 精髓(정수)인 것이다.

  樂'이란 음악이다. 그러나 禮記(예기)에서 말하는 음악, 천지와 더불어 和를 같이하는 음악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저번 글에서 孔子(공자)는 음탕한 음악을 지양한다고 했는데, 이는 음악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격탕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음탕하지 않은 음악의 한 예로서 저번 글에서 '양관삼첩'을 얘기했다.
  처음 들으면 대단히 심심하지만 들을수록 좋은 까닭은 이 곡이 바로 예와 악의 정신을 담고 있기에 그렇다고 여긴다.
  
  물론 그런 음악만이 좋은 음악이며 높은 수준의 음악이라는 얘기를 한다면 오늘날의 정서와 너무나도 맞지 않는다.
  
  락(rock)을 필두로 다양한 서양 대중음악들이 들어와 그 뿌리를 내린 오늘의 시점, 서양 클라식 음악을 잘 알면 교양 있는 사람으로 인지되는 지금 세상에서 그런 주장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클 것이다.
  
  壽齊天(수제천)이라는 대단히 느리게 연주되는 우리의 음악이 있다. 최근 들어서는 빠른 음악에 익숙해진 대중들을 위해 국악연주도 원래의 수제천이 지닌 가락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연주되고 있다. 국악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예절도 그렇다.
  
  공자가 말한 예란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과 교류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있어야 하는 절차이고 꾸밈이다. 꾸미기 위한 꾸밈, 가식적 꾸밈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위한 꾸밈이다.
  
  따라서 가식적인 꾸밈을 虛禮(허례)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음탕한 음악과 같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부합되는 의상과 행동을 하는 것은 그로서 상대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 결과 상대로부터 존중받기 위함인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예악을 말한 사람인데, 대략 10 년 전 쯤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때 필자가 느낀 것은 단 한가지였다. 오늘날 세상에서 공자는 개똥만도 못한 존재라는 점이었다.
  
  만일 어떤 이가 '예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목의 책을 낸다면 팔기도 전에 판매가처분 신청 등으로 갖은 고초와 구설, 협박에 시달리지 않겠는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거의 모든 과거를 부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공자가 죽어야 한다면 이율곡과 이퇴계를 비롯한 우리의 선현들은 도대체 몇 번을 죽어야 하는가?
  
  필자가 가장 아프게 느끼는 점은 우리가 우리의 조상과 정신을 부정하고 나면 우리는 '난 데 없는 후레자식'들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은 숭례문, 남대문이 불탔다고 해서 애통해할 필요는 또 어디 있는가. 모두 쓸어버릴 과거의 낡은 유물에 불과한 것을 말이다.
  
  더 아프게 느끼는 점은 우리가 그런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이니 뭐니 하는 말들이 이런 엄청난 열등감 속에서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세상은 늘 변하고 있다. 하지만 孔孟(공맹)과 老莊(노장)의 가르침을 버릴 필요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본다. 다만 그대로 답습할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본지를 살리면 될 것이고, 그 본지를 살려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세상에 창조란 없다는 말이 있다. 창조란 원래 있던 것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다듬어내는 일이라 본다.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우리가 장차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면 예악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새롭게 살려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공자가 얼마나 멋진 인물인지 예를 하나 들고자 한다. '논어'의 '선진'편에 있는 얘기이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과 얘기하던 중, 흔히들 그대들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하는데 혹시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정치적 포부가 큰 어느 제자는 약소국이라 해도 중용되면 3 년 안에 결코 약하지 않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했고, 어느 제자는 작은 지방을 다스려서 3 년이면 백성을 풍족하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런가 하면 약간 소심한 제자는 아직은 멀었기에 더 배워야겠다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에 마지막 남은 제자는 문답이 진행되는 동안 琴(금)을 타고 있었는데 자신의 차례가 오자 줄을 굵게 튕기고 나서 일어나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늦은 봄날 봄옷이 만들어지면 친구 대여섯, 아이들 예닐곱과 함께 강가에서 멱을 감은 후 바람 살랑대는 언덕에서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며 "나도 너처럼 하고 싶구나!"라고 했다.
  
  공자 하면 도덕의 대명사요 고리타분한 예절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그런 공자가 마지막 제자를 극찬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봄날 가까운 사람들과 강가에서 멱을 감고 언덕에 올라 바람을 쐬며 시를 읊조리며 논다는 것은 얼핏 보아 도덕의 경계는 아니다. 오히려 천지자연과 함께 노닐 것을 권한 莊子(장자)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공자는 앞서 예기에 실렸듯이, 大樂(대악)은 천지와 더불어 그 화를 함께 한다는 그 정신을 이 일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강조한 仁(인)이란 도덕의 경지이다. 그리고 樂(악)이란 예술로서 천지자연과 함께 하는 和(화)에 이르는 길이다.
  
  공자는 음악을 통해 얻는 和(화)가 仁(인)과 멀지 않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도덕과 예술이 하나임을 말이다.
  
  다만 공자는 장자와는 달리 樂만이 아니라 禮(예)도 함께 중시했던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남성 중심적이다 권위적이다 통치를 위한 도덕이다 등등의 비방은 공자가 아니라 공자가 살았던 바로 그 시대가 받아야 할 것이다.
  
  禮는 節을 위함이라 했는데 이는 천지자연의 질서이고 차례인 것이니 이 말이 무슨 말인가를 알려주는 재미난 얘기 하나 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중국 전국시대 말, 진나라는 점차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 때 '범수'라는 책사가 있어 진나라 왕에게 먼 나라는 친하게 지내면서 인접한 나라를 공격하면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이른바 遠交近攻(원교근공)의 전략을 제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훗날 진시황은 이 전략을 통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에 범수는 재상이 되어 권세를 누렸는데,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으니 '채택'이라는 젊은 책사였다. 채택은 여기저기에서 범수를 자극했다. 이에 범수는 화가 나서 채택을 불러 캐물었다.
  
  "듣자니 자네가 장차 나라의 재상이 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는데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어째서 자네가 나를 물리치고 재상이 될 수 있는지 그 까닭이 무엇이지?"
  
  이에 채택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변을 했다.
  
  "四時之序(사시지서) 成功者去(성공자거)"
  
  '춘하추동은 다 차례가 있어 공을 이루면 떠나는 법'이라는 말이다.
  
  성공했다고 너무 오래도록 권좌에 머물다가 비참한 말로를 보지 말고 이쯤에서 물러감이 마땅하지 않겠냐는 채택의 권유에 범수는 옳은 말이라 여기고 채택을 왕에게 재상으로 추천한 뒤 물러났다.
  
  이에 채택은 재상이 되었고 범수는 편안하게 살다 갔다. 범수는 천지자연의 질서를 알았던 것이니 예절에 밝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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