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의 이별 연습  _  2009.3.27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산다.

왜? 이유를 묻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고질적 습관.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것이고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현실의 삶에 대해 행복감을 더 느끼며
살기 때문이라 본다.

생각해본다.

먼 옛날, 남편들은 처자식을 부양하느라 산에 가서 노루나 사슴을 사냥했다.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노루 한 마리를 잡는 데 성공하면 쾌재를 부르며 어깨에 둘러매고 귀가했으리라.

기다리던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로 탕을 끓여
온 가족이 즐거운 저녁을 보냈을 것이다. 물론 아내는 남은 고기를 잘 갈무리했을 것이고.

남편의 기쁨은 그러나 사실 노루를 안마당에 내치는 순간까지였고, 노루탕 한 그릇 먹는 시간에는 벌써
다음 사냥에 대한 구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산에 사슴과 노루가 과연 몇 마리나 남았을까, 다른 놈이 와서 죄다 잡아가면 어떡하지 등등 여러 번잡한 생각.

그렇지만 아내는 배불리 먹었으니 즐겁게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가죽으로 무슨 옷을 만들어 입을까를 궁리하면서 계속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속으로 철이 없다 여긴다. 그러나 사실 아내는 현재의 상황,
오늘 배불리 먹었고 또 며칠 잘 먹을 수 있는 상황을 즐기는 것이다.
아내 역시 남편의 다음 사냥이 여의치 않을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 때 가서의 얘기인 것이다.

누가 더 현명한 것일까?

현명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를 떠나 아내는 스트레스를 덜 받고 따라서 더 오래 살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수량화할 수 없다지만 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산다는 것이 바로 행복의 징표가 아니겠는가.

아내의 욕망은 손에 들어온 노루 한 마리를 장악하는 데 있고, 남편의 행복은 저 산에 있는 노루와 사슴 전체를 장악하는 데 있다. 아내가 가진 욕망의 테두리는 남편이 잡아오는 노획물의 범위에 한정되었고, 남편 욕망의 테두리는 산 전체와 나아가서 그 인근의 산, 이런 식으로 마구 확장되어 테두리가 사실 없다.

아내의 행복은 결국 노루를 잡아오는 남편을 장악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면 불행해한다.

하지만 남편은 사냥터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는 한 행복한 법이 없다. 사냥터에 사냥감이 줄어들고 있다면 근심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가족에게 성실한 이상 궁극적으로 행복해한다. 하지만 사냥이 대박이 날 수도 있고 쪽박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편은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

남편의 행복과 만족은 지금 눈앞의 노루 한 마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래의 성과에 달려있으니 바로 리스크 무한대인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모' 아니면 '도'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의 세상은 아내들도 사냥터에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냥은 남성들의 영역이고 살림은 아내들의 영역이다. 인류가 어떤 연유로 이런 역할 분담 또는 분업을 하게 되었는지는 또 하나의 연구주제이겠다.

아무튼 리스크 무한대의 사냥은 잡아온 사냥감으로 일부 끼니를 해결하고 남는 것은 갈무리하는 일, 이른바 살림이라는 역할보다 스트레스가 클 것이고 이로 인해 남성이 여성보다 단명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역사적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실은 아내에게는 남편 자체가 사냥감이니 복종이 아니라 칭찬이라는 전략을 통해 남편을 장악해왔던 것이다.

오히려 복종 그리고 굴종은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남편들이 더 자주 겪는 현상이다. 비열함과 아부, 눈치 보기, 잔머리 굴리기는 사실 남자들이 훨씬 잘하고 또 능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성은 여성보다 욕망이나 야망이 더 크고 그에 따라 현실의 스트레스와 좌절감도 더 크다. 따라서 수명도 더 짧다.

필자가 이런 주제로 365 회 마지막 글을 쓰고 있는 이유? 물론 있다.

우리들은 욕망을 채우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 묻고자 한다.

과연 이 게임, 욕망 채우기 게임에 승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수 만의 사람에게 상담해주면서 관찰하고 느낀 바로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로서 한 개인의 욕망만 합쳐도 광대무변한 우주 전체보다 더 크지 않나 싶다.

한 가지 욕망을 달성하는 순간의 행복은 잠시이고 또 다른 욕망이 찾아든다. 간단없이 욕망이 자라고 생겨난다.

필자는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한히 욕망하는 거지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맹목적 의지'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도 이런 점을 얘기했던 것 같다.

욕망과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욕망의 달성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지 않은가!

욕망 달성이 행복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매달린다면 다음 순간에는 더 크고 더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이 찾아온다. 힘든 것을 쟁취하느라 애를 쓰다보면 우리의 삶이 어느덧 피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은 어차피 승산이 없다는 사실. 역사상 그 누구도 이 게임의 승자는 없었다는 사실, 필자가 상담을 통해 얻게 된 단순한 결론이다.

내 삶의 존재의의를 욕망의 달성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하는 것, 물론 나쁘지 않다.

욕망을 달성했다면 그 순간 삶의 기쁨을 만끽해도 좋다. 황금보기를 돌처럼 보지 말고, 황금이 던지는 그 순수한 광휘에 매료되어 한동안 감상해도 좋고 그 황금을 팔아 또 다른 욕망을 채워도 可(가)하다.

그러나 욕망 게임의 최종 승자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 이 점 만큼은 알고 이 게임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열심히 욕망 달성하기 게임을 하다가도 어느 때가 되면 우리가 아껴야 할 것, 진정한 우리의 자산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몸과 한정된 삶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욕망 게임을 대충 접어도 될 것이다.

어차피 게임이라면, 어려서는 마냥 뛰어놀고 혈기왕성한 청춘에는 엄벙덤벙 놀며 중년에는 진지하게 놀다가 노년이다 싶으면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려 내 몸과 마음의 양생을 통해 유한한 시간을 즐김이 어떨까!

내 몸과 마음을 양생한다는 것 역시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필요한 것은 욕망 게임에 승자는 없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욕망을 떠나 어떻게 삶을 즐기느냐고 묻는다면 필자의 답은 이렇다.

먼저 코로 숨을 잘 쉬고 있는지부터 확인해보라. 내뱉고 들이쉬는 숨결이 순조롭게 느껴진다면 그 숨부터 즐길 일이다. 아침 출근길의 신선한 공기, 얼마나 좋은가. 공연히 '도시의 썩은 공기'라는 관념일랑 던져버리고. 그저 서늘한 공기가 당신의 폐부로 들어온다면 그 공기를 즐기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대기를 즐기다보면 봄날 흐드러지는 개나리와 벚꽃의 저 화려한 향연도 보일 것이고, 여름날의 서늘한 녹음과 가을날의 새초롬한 저녁 별빛, 이어 겨울날 텅 비어 한가로운 들판을 보면서 삶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면 되지 않겠는가!

삶이란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의 연속이고 더하여 자식을 낳아 장성시키면 이 몸은 죽어 사라져도 내가 창조한 또 다른 몸을 통해 이어져 不滅(불멸)인 것이니, 이르길 낳고 또 낳는 것을 道(도)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니 쉬흔 중반의 필자는 슬슬 욕망을 내려놓고자 한다. 약간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욕망과의 이별을 연습할 때가 된 것이다. 욕망은 열정과 함께 왔지만, 그 부대낌과 채근질을 언제까지고 받아줄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새롭게 호를 지었다. 好好堂(호호당), 거센 욕망들을 내려놓고 나니 그저 마음이 좋고 또 좋아 호호당이다.

이제 <프레시안> 칼럼은 마지막이지만 음양오행으로 세상을 보는 파수꾼 노릇은 계속할 작정이다. 그래서 블로그를 만들고 있다. 4월초부터는 들어가 보실 수 있을 것이다. 주소는 www.hohodang.com 이다.

음양오행으로 세상을 보는 글들, 경제에 관한 글들, 그리고 언어나 역사, 신화에 관한 평소의 관심에 대한 글, 아울러 필자의 그림들을 올릴 것이다.

* 알리는 말씀

음양오행과 명리학 강좌 기초 클라스를 시작합니다. 언제나 하는 얘기이지만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드립니다.

장소는 양재역 근처 강의실입니다.

기간은 4월 첫째 토요일(4일) 오후 4시 반부터 8시까지, 주 1회씩 석 달에 걸쳐 진행됩니다.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이기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자유롭게 오셔도 좋습니다.

참강 문의는 제 메일 1tgkim@hanmail.net 이나 전화 534-7250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로 해서 사무실에 잘 있지 않기에 가급적 메일로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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