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  _  2009.8.18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을 지키는 것뿐......

(홀로 적막 안에서 침묵하고 하느님과 독대함이여, 참으로 실답고 즐겁고 감미로워라!)

나는 이제 곧 나의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우리 교단의 수도원장들이, 그분이야말로 영광의 하느님이라고 하나 나는 이제 그분을 그분으로 믿지 아니하고, 소형제회에서는 그이가 바로 환희의 하느님이라고 하나 나는 그이로 믿지 않으며, 경건함의 하느님으로도 믿지 못할 것 같다.

(하느님은 순수한 無(무)의 존재라서 때와 곳에 구애되지 않는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참으로 신심 있는 자들이 지복을 누리는 광막한 사막으로 들어간다. 오래지 않아 同等(동등)과 不同(부동)이 존재하지 않는, 적막과 화합과 적멸의 나라인 하늘의 어둠에 든다. 이 심연에서는 나의 영혼 역시 無化(무화)하여 동등함과 부동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심연에서는 모든 不和(불화)가 사함을 받는다. 나는 모든 차이가 잊히고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분별이 없는 깊고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수고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인지경의 적막한 神性(신성)에 든다.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호호당의 생각;

이 글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이윤기 역) 마지막 부분을 옮긴 것이다.

책의 제목이 한 몫을 크게 했고, 션 코너리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 때문에 국내 독서시장에서도 빅 히트를 친 에코의 소설을 나는 감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이 대목만은 소개해드리고 싶어 글을 올린다.

‘하느님은 순수한 無(무)의 존재라서 때와 곳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려드리고 싶어서 그렇다.

왜 이 말을 소개하는 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그저 즉자적으로 읽고 받아주시길 바란다.

만일 이 말을 파고들거나 논쟁을 할 것 같으면 한 10 년도 모자랄 것이니 아예 피하는 것이 좋겠다.

내 생각에 국내에서 이 소설이 가진 여러 재미를 골고루 맛을 보고 음미할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당연히 나도 그렇다.  

서양 철학과 기독교 신학 지식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14 세기 유럽 중세에 대한 정치 문제와 교단의 갈등, 이념의 갈등, 소설의 구조에 대한 이해 등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럴 것 같다.  

나는 1987 년 무렵 에코의 이 소설을 읽은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읽은 책만도 거의 백 권에 달한 정도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무료할 때면 가끔 이 소설을 읽는다.  

그에 비하면 그가 쓴 ‘바우돌리노’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은 상당히 이해가 쉽다. 그리고 정말 재미가 있다. 연신 키득거리고 때론 멍한 충격을 받곤 한다. 불면증이 체질화된 내 머리맡 가장 가까운 곳에는 바우돌리노가 항상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글을 읽고 나서 혹시 불교에서 말하는 寂滅不動(적멸부동)이란 어휘가 떠오르지는 않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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