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벼루에 새기는 글  _  2009.10.5
원제는 古硯銘(고연명)이다.  

벼루와 필묵은 모두 취지가 같은 동류이다. 들고 남이 가깝고 쓰이고 사랑받고 대우받음도 비슷한데, 수명만은 서로 다르다.

붓은 날로서 수명을 헤아리고, 먹은 달로서 헤아리지만 벼루는 世(세)로서 헤아린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몸으로 말하면 붓이 가장 예리하고 먹은 그 다음이며 벼루는 둔한 것이니, 둔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래갈 것이며 예리한 것은 당연히 짧다 하리라.  

쓰임으로 말하면 붓이 제일 많이 움직이고 먹은 그 다음이며 벼루는 고요한 것이니, 고요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래갈 것이며 많이 움직이기에 당연히 짧다 하리라.

내 이때로서 養生(양생)의 이치를 얻으니, 둔함으로써 몸을 삼고 고요함으로써 쓰임을 삼고자 한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모두 命數(명수)에 달린 일이라고. 그러니 둔하다고 오래살고 예리하다고 일찍 죽는 것 아니며, 많이 움직인다고 일찍 죽고 가만히 있다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니라 한다.

비록 그 말이 맞는다 할지라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벼루에 이렇게 銘文(명문)을 새긴다.

‘예리해선 아니 되니 둔함으로써 몸을 삼고, 많이 움직여선 아니 되니 고요함으로써 쓰임을 삼는다. 오직 그렇게 하는 것만이 긴 삶을 가능케 하리라.’

호호당 생각:

이 글은 중국 宋代(송대)의 唐子西(당자서)란 인물이 남겼다. 古文眞寶(고문진보), ‘오래된 글 중에 정말 보물과 같은 글’을 모았다는 뜻의 책에 들어있다.    

흔히들 비평에서 ‘날카로운 분석’이란 하면 좋은 글의 대명사로 쓰인다. 나는 그런 흐름에 반대한다. 글은 생각을 담고 있기에 예리한 글은 그 상대방을 다치게 한다. 다치게 하는 글을 쓸 바엔 아예 아무 글도 쓰지 않는 것이 훨씬 좋다고 나는 여긴다.

비판이나 비평에서 날카롭기 보다는 오히려 약간 너그럽게 함으로써 다소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보다 좋은 비평이고 비판이라 생각한다.

최근 한 10 년 사이 우리사회는 너그러움이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날선 지적을 통해 독한 살기만 더해가고 있다. 특히 인터넷 공간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까부셔라, 쥑여라, 마구 패라 등등 이런 종류의 글과 말이 되어야만 아군에게는 힘이 되고 적군에게는 타격이 되어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MB 악법, 4대강 죽이기, 이 무슨 참혹한 말들인가? 소수 야당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 시작하는 말부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정치도 아니고 정쟁도 아니며 그저 헐뜯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반대하더라도 고운 말 좀 쓰면서 하면 큰 일 나는 것도 아닌데, 참 세상이 그렇다! 숫자가 적고 힘에서 밀려도 품위를 잃지 않는 야당이 활동하는 세상은 언제쯤이나 보게 될는지.  

고연명의 원문을 옮긴다. 새겨보면 제법 의미가 깊은 말이다.
  
硯與筆墨 蓋氣類也 出處相近 任用寵遇 相近也 獨壽夭 不相近也
연여필묵 개기류야 출처상근 임용총우 상근야 독수요 불상근야

筆之壽 以日計 墨之壽 以月計 硯之壽 以世計 其故何也.
필지수 이일계 묵지수 이월계 연지수 이세계 기고하야.

其爲體也 筆最銳 墨次之 硯鈍者也, 豈非鈍者壽而銳者了乎.
기위체야 필최예 묵차지 연둔자야, 기비둔자수이예자요호.

其爲用也 筆最動 墨次之 硯靜者也, 豈非靜者壽而動者夭乎.
기위용야 필최동 묵차지 연정자야, 기비정자수이동자요호.

吾於時得養生焉 逸爲體 以靜爲用.
오어시득양생언 이둔위체 이정위용.

惑曰壽夭數也 非鈍銳動靜所制,
혹왈수요수야 비둔예동정소제,

次令筆不銳不動 吾知其不能硯久遠矣.  
차령필불예부동 오지기불능연구원의.

雖然寧爲此 勿爲彼也.
수연영위차 물위피야.

銘曰不能銳                不能動 因以靜爲用.
명왈불능예 인이둔위체 불능동 인이정위용.

惟其然 是以能永年.
유기연 시이능영년.

(에디터 에러로 '인이둔위체' 한자 글이 깨져서 그냥 둡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