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으로의 항해 ( Sailing to Byzantium) #1  _  2012.1.22
1.

저 세상은 늙은이들이 살 곳은 아니야,
자 보렴, 젊은 것들은 짝을 지어 껴안고 있고
숲속의 새들은 짝을 찾느라 연신 지저귀고 있잖아,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저 죽어가는 것들을 봐!
산란하기 위해 수 천리 물길을 찾아온 연어는  
물살 거센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바다에는 고등어가 짝을 짓느라 득실대고 있잖아?
저 모든 것들, 사람이나 물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이나 모두
그저 배고 태어나고 죽는 저 일에 몰두해 있지 않니?
그저 본능 아니 관능의 음악에 취해 있을 뿐
세월 속에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 같은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지 않니?
그러니 이곳은 나와 같은 늙은이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저들의 세상이 아니겠어?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
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Those dying generations—at their song,
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
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Monuments of unageing intellect.

2.

그럼 난 뭐야? 늙어빠진 나는 도대체 뭐냐고?
솔직히 말해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막대기 위에
낡고 헤어진 외투를 걸쳐놓았을 뿐이지,
혹 영혼에서 울려나와 박수를 치고 노래할 수 있다면 모를까?
언젠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갈 이 낡은 외투의 조각조각들을 위해
더 높고 힘찬 영혼의 노래를 불러댈 수 있다면 혹 모를까
그냥 늙은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
그런데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자신만의 장려한 기념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런 영혼의 노래를 가르쳐줄 노래교습소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난 먼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온 것이라네.

An aged man is but a paltry thing,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and louder sing
For every tatter in its mortal dress,
Nor is there singing school but studying
Monuments of its own magnificence;
And therefore I have sailed the seas and come
To the holy city of Byzantium.

3.

아, 성자들이시여, 황금으로 새겨진 모자이크 속에
신의 성스런 불 속에 영원히 서 계시는 당신 성자들이시여,
성스런 불로부터 나오셔서 허공으로부터 감돌며 내게 내려오시라,
오셔서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주시라.  
욕망에 찌들고 병든 내 심장,
한 번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어야할
유한한 생명에 얽매어 스스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나의 심장을
말끔히 태워주시오, 그리하여 나 역시도
벽속에 장식된 저 영원한 예술품 속으로 넣어주시오.

O sages standing in God's holy fire
As in the gold mosaic of a wall,
Come from the holy fire, perne in a gyre,
And be the singing-masters of my soul.
Consume my heart away; sick with desire
And fastened to a dying animal
It knows not what it is; and gather me
Into the artifice of eternity.  

4.  

나고 죽는 제 세상으로부터 한 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 다시는 저 자연 속에 존재하는
피와 살로 된 그 어떤 몸둥이 같은 것은
취하지 않으리라,
먼 옛날 희랍의 金細工(금세공)장이가  
졸음에 겨운 황제를 깨우기 위해
금으로 入絲(입사)하고 琺瑯(법랑)하여
만들었다는 한 마리 황금의 새가 되어 지저귀리라,
아니면 황금의 가지 위에 앉아
비잔티움의 여러 귀족들과 귀부인들에게
지나간 일들과 눈앞을 지나가는 현재, 그리고 또 다가올 미래를
노래로서 들려주리라.

Once out Of nature I shall never take
My bodily form from any natural thing,
But such a form as Grecian goldsmiths make
Of hammered gold and gold enamelling
To keep a drowsy Emperor awake;
Or set upon a golden bough to sing
To lords and ladies of Byzantium
Of what is past, or passing, or to come.



-감상과 해설을 위한 入門(입문)-

20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서구 詩人(시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남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 이란 시다.

오늘은 (심혈을 다해) 이 시를 해설하고 감상해보고자 한다.

방금 ‘심혈을 다한다’는 말을 했는데,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고 또 비록 어렵더라도 이 시가 지닌 맛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픈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로서는 정말 정성을 다한 대단한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시를 우리말로 옮겨보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도저히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앞에서처럼 사람들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도록 意譯(의역)을 해보았다.

시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소 해두고픈 말들이 있다.

예이츠하면 ‘이니스프리의 호도’라는 시, “나 이제 가련다/이니스프리로 가련다/진흙과 나뭇가지로 작은 집 짓고/아홉 이랑 콩밭 갈고 꿀벌도 치며/벌이 노래하는 숲 속에서 홀로 살련다‘”고 하는 牧歌(목가)적인 시로서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우리에게도 꽤나 알려진 시인이다.

‘이니스프리의 호도’만 해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물론 영어로 된 原詩(원시)의 미묘한 韻律(운율)을 살려내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사실 다른 나라의 詩(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예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자유시에 이르러서는 운률이 중요하지 않으니 그런대로 원시의 형식에 맞추어 어느 정도 번역이 가능하긴 하지만 律格(율격)을 갖춘 英詩(영시)를 그 뜻과 양식에 맞추어 번역하면서 시가 가진 운율까지 어느 정도 반영하면서 제 맛을 내려면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 역시 운율을 갖춘 시이기에 번역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시 역시 ‘ottava rima’ 라고 하는 8행시, 즉 ab ab ab cc로 押韻(압운)을 하는 시체를 따르고 있다.

이게 뭔 말인가 하면 앞의 예이츠 시 첫 단락을 가져다놓고 설명해보자.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
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Those dying generations—at their song,
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
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Monuments of unageing intellect.

줄의 마지막 단어가 young-trees-song-seas-long-dies-neglect-intellect 로 되어있다. -ng 와 -s 로 이어지다가 마지막 두 줄은 -t 로 끝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스타일의 운율을 ‘ottava rima’ 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말로 옮길 경우 시가 가진 미묘한 음악성까지 옮겨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 唐詩(당시)를 번역할 때 시가 가진 음악성을 옮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래도 우리말로 옮길 때 운율은 포기한다 해도 그래도 전체의 줄이나 내용 정도는 가급적 원시에 맞추어 번역하는 것이 바른 길인데, 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는 그 마저도 대단히 어렵다.

그냥 번역했다가는 시가 가진 의미와 뜻을 도저히 이해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아주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존경하는 시인 정현종 씨가 번역하고 민음사에서 1973 년에 펴낸 예이츠의 시집 ‘첫 사랑’이란 번역 시집을 통해서였다. 나는 이 시집을 대학교 1학년 시절인 1974 년에 샀다.

나는 젊은 시절 정현종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했고 예이츠의 시도 그 책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시의 경우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어 봐도 원뜻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 이후 다른 사람들의 번역이나 해설을 찾아다니면서 들어봐도 역시 미진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이츠의 이 시는 그 난해함과 모호한 상징성으로 인해 서구 세계는 물론 우리의 많은 영문학도들과 현대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는 꽤나 대중적인 면도 있다.

일례를 들면 No Country for Old Men, 우리말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고, 또 몇 년 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소개된 적도 있었는데, 예이츠의 시 첫 구절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온 것이다.

널리 애호되고 인기가 많은 것은 좋지만, 기본적으로 도대체 무슨 말을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오랜 궁금증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2003 년 무렵 나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 철학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예이츠의 시와 세계관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이른바 ‘신플라톤주의’라고 하는 중세 서양 철학과 ‘헤르메티시즘’이란 중세의 사상에 대한 책들과 접하면서부터 였다.

이 두 사상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서 하나의 교리를 세우는 과정에서 異端(이단) 내지는 異敎(이교)사상으로 치부되는 바람에 말하자면 지하에 숨어들어야 했던 사조였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플라톤주의 철학이나 헤르메티시즘에 관해서는 방어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말하면 서양 철학의 수 천 년에 걸친 큰 흐름을 주름 잡았던 사조는 바로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티시즘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서구 철학자는 물론 기독교 신학자들까지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생소하겠지만 ‘프로클로스’라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 이탈리아 르네상스, 괴테의 세계관과 헤겔의 역사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물론 예이츠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줄여 말하면 서양 철학사 전체가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이처럼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면서도 공식적으로 또 표면적으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포장되고 있는 서양 철학이고 기독교 신학이라는 점이다.

이는 마치 음양오행과 노자의 도덕경이야말로 동북아시아 사상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오면서도 겉으로는 유교 철학인 성리학과 불교 사상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동서양 모두가 이렇게 된 까닭은 사상과 종교 분야 역시 권력적인 요소를 떠나 성립될 수가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서양의 경우 기독교를 절대교의로 삼았던 문명이고 동북아시아의 경우 유교를 정통으로 삼았던 탓이다. 다시 말해 공식적 진실과 현실의 실체는 다를 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돌아와서 얘기하면 예이츠의 후기 시세계, 바로 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 역시 예이츠 자신이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헤르메티시즘의 영향 속에서 스스로 다듬어낸 철학과 세계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서구의 많은 예이츠 비평가들은 예이츠의 시를 엄청 애호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가 가진 모호한 알 수 없는 신비주의에 대해 힘들어하거나 꺼려한다.

그러나 그 모호한 신비주의란 것이 다름 아니라 신플라톤 철학이고 헤르메티시즘인 것이다.

서양 친구들은 잘 모르든지 또 기독교 정통교리와 다소 상이하다 싶으면 그저 ‘신비주의라는 식으로 糊塗(호도)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까닭에 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에 대한 국내 작가들의 번역이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구 비평가들도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을진대 국내에서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오늘 머리 부분에 써놓은 내용은 시를 맛깔나게 옮긴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원시가 가진 뜻을 최대한 이해 가능할 수도 있도록 그 내용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여전히 해본다.

나는 2003 년 이래 음양오행의 순환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프로클로스를 비롯한 신플라톤주의 학자들의 책 이어서 헤겔에 이르는 서양 철학자들의 책과 접해왔고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헤르메티시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헤르메티시즘의 주장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道(도)에 관한 주장과 상당 부분 유사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초 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를 해설하고 감상하기 위한 전제 작업을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설을 하루 앞둔 오늘 지금 이 시간 글도 길어졌고 나 스스로도 더 많은 상념이 떠올라 글을 써나기가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은 일단 앞에 써놓은 예이츠의 영문 시와 의역된 글을 스스로 감상해보시길 바라면서 다음 기회에 본격 해설과 감상을 쓸 것을 약속드린다.

(대문에 파도치는 바다 그림을 올리면서부터 나는 비잔티움으로 항해해가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저 푸르고 차가운 바다 사진과 함께 상념에 잠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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