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 중 樂書(악서)에서  _  2011.8.20
滿而不損則溢(만이불손즉일)이요 盈而不持則傾(영이부지즉경)이라, 사마천의 史記(사기) 중 樂書(악서)에 적혀있는 말이다.

가득할 때 덜어내지 않으면 넘칠 것이요, 잔이 찼을 때 잘 잡지 않으면 기울어 쏟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욕망이란 대개 가득 채우고자 할 뿐, 덜어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은 가득차면 덜어내어야 하고 잔에 술이 가득하면 쏟기 쉽다고 말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 말로서 樂(악)이란 무엇이고 또 왜 필요한 가를 설명하고 있다.

樂(악)이란 문자 그대로 즐거움이니, 즐거운 것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서의 音樂(음악)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앞에서처럼 ‘덜어내라, 자칫 쏟을라’ 하면서 아주 수상쩍은 말을 꺼내고 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이어지는 말을 좀 더 보자.

凡作樂者(범작락자)는 所以節樂(소이절락)이라. 즉 무릇 음악을 만드는 것은 그로서 그 즐거움을 절제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인기 프로그램 ‘나가수’의 공연처럼 모든 가수가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최고의 감동과 감흥을 줄 수 있느냐를 놓고 겨루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즐거움을 절제하는 데 음악을 만드는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사마천이 뭐라 했는지 좀 더 보자.

君子以謙退為禮(군자이겸퇴위례)하고 以損減為樂(이손감위락)이니 樂其如此(악기여차)라.

‘군자는 겸손히 물러서는 것으로서 예를 행하고, 덜어내고 줄이는 것으로서 즐거움을 삼으니 음악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마천이 한 말은 비단 사마천의 생각에 그치지 않고 禮(예)와 樂(악)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서로 간에 평화롭게 共存共榮(공존공영)할 수 있다고 여겼던 동아시아 사상의 본질이고 본류이다.

음악이란 여러 악기가 내는 소리를 통해 즐거움을 맛보고 그 즐거움의 극한까지 가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어느 선에서 절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이 생각이 바로 동아시아 음악의 핵심 사상이었다.

음악은 동서양 모두 예부터 調和(조화)를 중시해왔다.

조화로운 소리의 울림을 영어로는 하모니, harmony 라고 하지 않는가!

동아시아의 음악만이 아니라 서구 역시 고전음악은 근본적으로 악기가 내는 소리간의 조화로운 울림을 중시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그 조화를 버리고 말았다.

특히 현대 음악의 주류인 대중음악은 얼마나 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수 있는지 또는 흥겨운 기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쳐 날뛰게 할 수 있는지에 주안점을 둔다. 하드락 또는 헤비메탈 같은 음악이 그 대표라 하겠다.

사실 서양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동아시아에서 樂(악)은 본래 즐거움이자 음악을 뜻한다. 그리고 음악의 즐거움은 즐거움을 다하는 데 있지 않고 즐겁되 어느 선에서 자제하고 절제하는 것을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니 오늘의 생각이나 정신과 그 얼마나 다른가, 달라도 천지차이로 다르다.

동아시아에서 즐거움과 그 절제 간의 균형을 최고조로 이룩했던 음악이 바로 雅樂(아악)이라고 하는 양식이다. 아담하고 우아한 음악인 것이다.

우리 아악 중에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아마도 壽齊天(수제천)일 것이다.

대단히 장중하고도 느릿느릿하게 소리가 들고 난다. 듣고 있노라면 흥이 날듯 말듯 그렇게 진행해간다. 하지만 끝내 그 흥은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흥이 나지만 그 흥을 절제하는 데 음악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국립국악원을 가도 제대로 된 수제천 연주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느려서 대중들에게 ‘어필’하지 못 한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점차 빨라져 버린 것이다. 요즘의 대세는 대중들의 호응을 어떻게 하면 얻느냐 하는 것이니 그렇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국악의 대중화가 아니라, 비겁한 타협이고 변절이라 하겠다. 물론 대중의 외면 속에 아예 국악이 사라지느니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길게 보면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말 속에 우리 국악의 아픔과 고민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정말이다! 전통을 계승해간다는 것은 이처럼 힘겨운 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그 엉터리 수제천일지언정 기꺼이 들어준다. 때로는 듣다가 이건 아악이 아니야 하며 울분이 솟구친 나머지 그만 연주회장을 떠나기도 하지만.

물론 나 역시 ‘나가수’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한다. 가수들의 뛰어난 기예에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꼭 저것만이 음악은 아닌데 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동서양 모두 古典音樂(고전음악)의 정신은 음악을 즐겁되 그 속에서 節制(절제)를 찾거나 또는 調和(조화)를 추구했고, 오늘에 이르러 음악은 그와 정반대로 娛樂(오락) 또는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이 되었다.

절제, 내 마음을 편하고 자유롭게 하되 마냥 저가는 대로 두지 않고 어느 선에선가는 거두는 마음이다.

오락, 우울하고 힘들거나 괴로울 때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싶을 때, 넋을 놓고 싶을 때, 심심할 때 한 번 빠져 보고픈 마음이다.  

전자는 사실 귀족의 정신이고 후자는 서민의 정신이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은 대중 민주주의의 시대인 까닭에 그 두 가지를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대가 신분이 귀족이 아니라 정신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나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고전음악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다.

요즘 젊은 학자들은 배운 것이 오로지 서구 근대 사상가들의 것이 전부인 까닭으로 그를 기반으로 과거를 함부로 재단하고 비판하는 소견 좁은 병폐를 보이고 있으니 이 또한 과거를 이해함으로서 소통하기 위한 자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 지식인들의 풍토가 더욱 그렇다.

과거를 이해할 때 미래로 향한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인데, 그저 과거에 대한 몰이해와 否定(부정)만으로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2천년도 더 된 사마천의 여덟 서 중에서 樂書(악서)에 적혀있는 앞의 말들을 다시 한 번 옮기고자 한다.

滿而不損則溢(만이불손즉일)이요 盈而不持則傾(영이부지즉경)이라,

가득할 때 덜어내지 않으면 넘칠 것이요, 잔이 찼을 때 잘 잡지 않으면 기울어 쏟을 것이라,

凡作樂者(범작락자)는 所以節樂(소이절락)이라,

무릇 음악을 만드는 것은 그로서 그 즐거움을 절제하기 위함이라,

君子以謙退為禮(군자이겸퇴위례)하고 以損減為樂(이손감위락)이니 樂其如此(악기여차)라.

군자는 겸손히 물러서는 것으로서 예를 행하고, 덜어내고 줄이는 것으로서 즐거움을 삼으니 음악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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