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으로의 항해 ( Sailing to Byzantium) #2  _  2012.1.23
설 전날 저녁 홀로 작업실에서 예이츠의 시에 관해 얘기하면서 상념에 잠기다 보니 지치고 힘들어서 그만 정작 본론인 시의 해설과 감상에는 미처 들어갈 수 없었다.

이제 늦은 밤 시간, 쉬고 나니 기력이 다시 회복되었기에 다시 이어가기로 한다.  

영어 본문과 함께 의역해놓은 글을 보면서 얘기해보자.

제1단락이다.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
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Those dying generations—at their song,
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
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Monuments of unageing intellect.

저 세상은 늙은이들이 살 곳은 아니야,
자 보렴, 젊은 것들은 짝을 지어 껴안고 있고
숲속의 새들은 짝을 찾느라 연신 지저귀고 있잖아,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저 죽어가는 것들을 봐!
산란하기 위해 수 천리 물길을 찾아온 연어는  
물살 거센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바다에는 고등어가 짝을 짓느라 득실대고 있잖아?
저 모든 것들, 사람이나 물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이나 모두
그저 배고 태어나고 죽는 저 일에 몰두해 있지 않니?
그저 본능 아니 관능의 음악에 취해 있을 뿐
세월 속에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 같은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지 않니?
그러니 이곳은 나와 같은 늙은이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저들의 세상이 아니겠어?

제1단락 해설;

사실 8행으로 되어있으니 번역도 8행으로 해야 마땅하겠으나 그러면 시가 의도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서 앞의 글처럼 열 줄로 풀어놓았다. (모든 것을 무시하고 뜻 전달에 치중했다.)

시인은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이라는 문구로서 시작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저것은 늙은이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야’가 된다.

여기서 ‘저것’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저 세상이라 하는 것일까?

자신과 같은 늙은이들은 이 세상에서 이제 별 존재가치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라 하는 것이다. 내 세상 또는 우리들의 세상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세상이란 뜻이다.

그러면 어떤 까닭에서 늙은이들의 세상이 아니라 하는 것일까?

온 세상이 젊은 생명들의 사랑 잔치로 가득하다. 보면 젊은 남녀는 도처에서 사랑하느라 껴안고 입맞추며 뒹굴고 있고,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새들이 숲속에서 지저귀는 것 역시 짝을 찾는 울음이다.

여기서 시인은 어느 봄날 산책을 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다가 젊은이들의 데이트하는 광경을 보았고 또 공원의 숲 속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죄다 짝을 찾고 짝을 짓느라 정신들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에 시인은 참 너희들 세월 좋구나 하며 부러워한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처럼 시인은 자신의 세월이 지났음을 서글퍼하고 있다.

하지만 마냥 부러워하고 시샘하자니 그게 더 서러웠던 모양인지 시인은 너희들도 언젠가는 나처럼 결국 죽어갈 운명이 아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너희들이나 내나 결국 대충 50 년 뒤에는 모두 땅속에 들어갈 운명들 아니겠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 시인은 상념에 잠겨든다. 관절도 시원치 않고 이른바 정력도 고갈된 지 오래, 이제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더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언젠가 보았거나 아니면 전해 들었던 광경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연어는 물의 상류에서 태어나 일단 바다로 들어가면 수 천 마일 밖의 먼 대양을 헤엄치고 다니다가 산란할 때가 되면 다시 수 천 마일 떨어진 태어난 고향으로 회귀해온다.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찾아올 수 있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정말 신기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연어는 거센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심지어는 거의 수직의 폭포도 안간힘을 다해 거슬러 오른다. 도중에 기다리고 있던 곰들에 의해 무수히 잡혀 먹히면서도 연어들은 맹목적인 생식 본능 하나만으로 그 험한 길을 고집한다.

연어를 보면 생식에 대한 생명들의 본능이란 것이 그 얼마나 대단하고도 철저한 힘인가에 대해 진저리가 쳐진다.

다시 시인은 상상해본다, 차고 거친 북해의 대양에 가면 고등어들이 무수히 우글거리면서 짝을 찾고 수정하고 알을 낳는다. 무리지어 다니는 고등어 떼는 어부들에겐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뭉쳐서 다니면 위험한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고등어들은 생식을 위해 떼를 지어 다닌다. 저건 또 무슨 이유, 저 대단한 생식 본능에 대해 시인은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친다.

뿐만 아니다, 앞서의 젊은 남녀는 물론 연어와 고등어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들, fish 와 flesh 와 fowl 들, 다시 말해 물고기와 네 다리로 걷는 짐승들과 하늘을 나는 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들이 여름이 다 가도록 본능의 삶을 구가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all summer long’ ‘여름 내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왕성한 삶의 때, 그러니까 젊은 때를 모든 생명들이 구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시인의 때는 이제 늦가을 아니 어쩌면 초겨울인 것이고.)

그들이 무슨 삶의 때를 謳歌(구가)하고 있는가?

다름 아니라, 그저 새끼를 배고 또 낳고 하는 (따라서 결국에는 죽어갈) 과정 자체를 끊임없이 맹목적으로 그저 즐겁다 하면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며 본능에 의해 주어진 관능 또는 욕정에 이끌리는 과정일 뿐이다. 이를 시인은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즉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최근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을 위시하여 여러 콘테스트와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유행이다.

거기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은 관중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런데 관중이 호응하고 감동한다는 것은 결국 가수가 어떻게 노랫말, 메시지를 자신의 감정에 실어 잘 전달하느냐에 달렸다.

실연의 상처, 짝사랑의 아픔, 떨어져서 보고픔, 이른바 유행가란 대부분 남녀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이 모두 sensual music, 관능의 음악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사실 모든 대중예술은 그 밑바닥에 관능을 깔고 있다. 소위 ‘섹시함’이 중요한 것이다. 섹시하면 돈이 되고 섹시하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 우리들의 세계인 것이다. 이를 시인은 ‘저것은 늙은이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야’라고 질투어린 말을 하게 만들고 있음이다.

이에 시인은 간단히 그냥 말하면 몹시 서럽고 외롭다.

‘아, 저놈들, 세월 속에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 같은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구나‘ 하고 탄식하게 만들고 있다.

‘unageing intellect’란 나이먹지 않는 지성, 다시 말해 세월 속에 변치 않는 불멸의 지성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 또는 ‘불멸의 理性(이성)’을 뜻한다.

여기서 시인은 ‘불멸의 이성’이 ‘관능의 음악’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애써 항변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젊은이들의 세상, 관능의 음악에 도취해서 마냥 그 세월을 구가하는 것이 대단히 부러운 것이다.

慾望(욕망)은 理性(이성)에 앞선다, 이게 현실임을 나 호호당 역시 쾌히 인정한다.

냉정히 보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욕망을 원동력으로 해서 돌아가고 발전해가는 세상이다. 이성이란 것은 그 욕망에 대해 약간의 자제와 절제를 촉구하는 역할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첫 단락의 해설을 마칠 때가 되었다.

이 단락에서 시인은 온 세상이 결국은 생식을 위한 관능의 음악이 지배하고 있으니 그런 세상은 자신과 같은 늙은이들, 차가운 이성에선 비록 다소 앞선다 하겠으나 관능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슬픈 自嘲(자조)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양이 많아졌다. 다음에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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