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가셨는데  _  2023.1.20
새 블로그 주소는 hohodang.tistory.com)   티스토리 블로그엔 자연순환운명학에 대한 더 많은 그림과 동영상 강좌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점도 알려드린다.


코로나19 탓에 거의 열흘 만에 글을 쓴다. 발열 후 앓은 것은 나흘인데 그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기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코로나는 후유증이 있다.  

앓고 있는 와중에 머리를 스쳐간 구절이 하나 있었다. 찾아서 올려본다.

이 세상은 나에게 모습을 주어서 그 위에 실어놓았고 내게 삶을 주어서 수고롭게 하며 또 내게 늙음을 주어 편하게 해주며 마침내 죽음을 주어 나를 쉬게 한다.

원문은 이렇다. 大塊(대괴) 載我以形(재아이형), 勞我以生(노아이생), 逸我以老(일아이로), 休我以死(휴아이사).

大塊(대괴)는 직역하면 큰 덩어리란 말로서 커다란 땅 또는 나아가서 이 세상을 뜻한다. 태어나기 전의 나는 형태가 없었으니 일단 모양을 갖추어서 세상에 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삶이란 것을 주어서 고생시킨다, 맞는 말이다, 삶이 없었다면 힘든 일이 있었으랴! 그런데 계속 고생만 시키는 것은 아니고 늙게 해서 그나마 좀 편안하게 해준다고 하며 마침내 죽음을 선물함으로써 영원한 休息(휴식)을 준다고 한다.

20년 전에 열심히 읽었던 淮南子(회남자)란 옛 책 속에 실린 구절이다. 처음 이 구절을 대했을 때 사실 좀 어이가 없었다. 삶을 통해 고생시킨다는 저 말, 늙음을 주어 사람을 그런대로 편안하게 한다고 하며 죽음으로써 아주 쉬게 한다고 하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늙는다는 것, 누구나 일단 싫어하는 말인데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다. 틀릴 말도 아닌 것이 늙으면 체력이 떨어지고 그 바람에 성질도 좀 누그러뜨린다, 성질을 내려고 한들 힘이 없어서 절로 온순해진다.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또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해 나를 아주 쉬게 한다고 한다. 그렇지 죽어야만 모든 게 편하지, 더 이상 불편하거나 힘들 여지가 없으니 그 또한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저 구절은 전부 反語(반어)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듯이 산다는 것은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할 터인데 살아가는 바람에 고생한다고 한다. 늙음도 죽음도 모두 그렇다. 우리가 싫어하는 일들을 다 좋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꽤나 충격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묘하게 틀린 말도 아니네 싶었다. 어떤 일이든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았다.

언뜻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설파한 싯다르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 책이 만들어진 것은 중국에 불교가 처음 소개되기 적어도 백년도 더 훨씬 전의 일이다. 저 구절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나니 사람이네, 그러니 나는 과연 나비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그리고 어느 것이 진짜 꿈일까? 를 묻고 있는 莊子(장자)의 영향을 받은 글이다.

참고로 회남자 속 첫째 글은 老子(노자)의 계열이고 둘째 글은 莊子(장자) 계열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노자와 장자는 내용적으로 달라도 많이 다르다. 노자는 ‘돌직구’이고 장자는 세상 가치관을 뒤엎는 逆說(역설)이지만 老莊(노장)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실 그들에 대한 큰 결례이다.

그런데 앓고 있는 와중에 저 구절이 떠오른 까닭에 대해 얘기를 좀 해야 하겠다.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해준다고 했는데 그 편안함에도 대가가 있다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코로나19를 걸린 뒤에 별 고통 없이 쾌유되는데 늙고 나니 뒷맛이 꽤 세다. 늙었다고 그냥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력이 부족해서 힘을 쓰지 못하는 탓에 남 보기에 편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앓다 보니 힘이 들고 그래서 투정 부릴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문득 저 회남자의 구절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회남자의 두 번째 글, 장자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저 글은 제목이 “숙진훈”인데 이왕 읽은 김에 모처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글 속에는  “聖人(성인)이라도 命(명)을 얻어야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다”는 표현도 나온다. 읽으면서 슬쩍 웃게 된다.

덕이 크고 재주가 있어도 하늘로부터 받은 명 즉 天命(천명)이 있어야만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는 말인데 이 대목이야말로 옛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命(명)이란 運(운)을 말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가령 “저 친구 진짜 대단한 것 같은데 時運(시운)이 따르지 않다 보니 그냥 저렇게 별 볼일 없이 일생을 지내는구나!” 하고 안타깝거나 애석하게 여길 때가 있다.

그래서 출세나 성공이란 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을 떠나 그저 우연 또는 福不福(복불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좀 위험하다. 좋은 명이나 호운이 주어지는 게 우연한 확률의 문제라 여길 경우 세상을 원망하게 되는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난 운이 따르지 않아서 내가 가진 능력이나 노력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자기변명 또는 자기합리화의 빌미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에 주변의 누군가가 자신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성공하거나 출세할 것 같으면 그를 시기하거나 원망하게 하는 치졸한 생각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쟤는 나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대인 관계 특히 윗사람에게 ‘아부’를 잘 하는 바람에 저렇게 잘 나가는 거야, 하는 생각 등등 말이다.

이 대목에서 阿附(아부)라든가 阿諂(아첨)이란 표현에 대해 약간 얘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부란 표현은 원래 阿附迎合(아부영합)이란 사자성어로 많이 쓰이던 표현이다. 또 그와 연관해서 曲學阿世(곡학아세)란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벼슬길에 나아가야만 입신출세할 수 있던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의 유교문화, 즉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통해 만들어진 弊端(폐단)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상업 문화 즉 장사하는 것 즉 장사치를 천하게 보던 구시대의 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적 전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상한 형태로 끊임없이 변용되면서 살아있다.

오늘의 시대는 누가 뭐래도 비즈니스의 시대, 즉 商業(상업)의 시대이다. 장사나 비즈니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의 니즈(needs)에 부응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고객의 취향에 영합하고 아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장사의 스킬이라 하겠다.

이는 비단 장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조직이든 학문의 세계이든 권력을 쥔 사람의 취향에 영합하는 것은 생존의 필수 기술이란 사실이다. 이는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불변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양 특히 앵글로 색슨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상업 문화이기에 그런 점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목적 달성을 위해 이른바 간과 쓸개를 아낌없이 다 털어내는 것을 당연시한다. 우리 역시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과거 유교 신분 사회에 있었던 ‘선비’의 자세를 높이 사는 풍토가 조금은 남아있다.

선비, 재물이나 권세를 탐하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더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말이다. 이 선비에 대한 존중은 오늘에 이르러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이란 말과 통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비판적 지식인이란 사람들 또한 권력과 출세에 대해 그렇게 강직하지가 않다. 권력이 불러주기만 하면 금새 감사합니다, 땡큐 하면서 달려가지 않는가. 우리 사회의 경우 예전에 소위 군사독재 시절에만 해도 비판적 지식인들이란 게 그나마 성립 가능한 얘기였지만 민주화가 된 이후론 그런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비판적 지식인이란 게 오히려 서구 인문학(liberal arts) 세계에선 가능하다. 일단 정년을 보장받고 나면 얼마든지 체제를 비판해도 어느 선에선 기꺼이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것이 인간의 심성에 관한 것이고 일정 부분 과거 종교가 맡았던 역할을 대행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특히 인문학이란 게 우리 사회 내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글을 정리해야 하겠기에 조금 더 얘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길은 이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한 번 정리해본다.  

공부 잘 해서 고수입을 보장받는 의대를 가든가 아니면 이공계통을 통해 유학을 다녀와서 대기업 기술직 쪽에서 한 자리 하든가, 그게 아니라 인문계통이라면 로스쿨을 통해 갖은 빽과 줄을 동원해서 좋은 로펌에 들어가서 열심히 아부하면서 돈을 벌든가, 그게 아니면 5급 국가고시에 승부를 거는 길이 그것이다.

또는 집안에 돈이 좀 있어서 진작부터 국제학교를 통해 외국 명문대에 진학해서 커리어를 만들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최소한 이른바 스카이(SKY) 간판이라도 붙이고 사회에 진출하든가, 이런 것이 이른바 정규 코스이다.

비정규 코스가 없진 않다. 미모가 출중하거나 특출한 재능이 있을 경우 예체능 쪽으로 죽기 살기로 진출해보는 길이 그것이다. 확률적으론 대단히 희박하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성공의 길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심플하다. 그나마 예전엔 이런저런 길들이 제법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아파트 한 채만 잘 굴려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숨막혀할 수밖에.

불변의 한 가지는 노력이 바로 運(운)이란 사실이다. 나 호호당이 평생에 걸친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 한 가지가 바로 이 점이다.

새 블로그 주소는 hohodang.tistory.com)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