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이르는 세 번째 코스로서 좋은 선생, 良師(양사)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싯다르타도 그냥 어느 날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적지 않은 스승들을 만났고, 예수님도 물로 세상을 청소하는 요한을 만나 세례, ‘영혼의 클리닝’을 받았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도 많은 스승들을 만났을 것이다.
선생을 만나기 위해 길을 가는 과정을 가장 아름답게 얘기한 글은 역시 화엄경 속 入法界品(입법계품)일 것이다.
법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니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얘기가 바로 입법계품이다. 주인공 선재동자의 善財(선재)는 ‘뛰어난 재물 혹은 보물’이란 의미이니 깨달음을 말한다.
선재동자-역시 남자-는 세상에 뛰어난 지혜를 가진 스승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개의치 않고 찾아간다. 그리하여 그 스승은 무려 53 명이나 된다.
스승으로부터 또 다른 스승을 소개 알선 받는 방식의 求法(구법)여행이니, 스승의 계보도 모두 알음알음이다. 그래서 인연이 중요한 것이다.
글에 보면 선재는 도상에서 밥벌이를 하지 않는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먼 여행을 떠나려 할 때, 먹을 것과 기타 취사도구 등등 너무 많은 짐을 지고 길을 떠날 필요가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많은 것을 등에 지고 출발한다 해도 가다보면 다 버려야 할 것이다.
도를 구하는 여행은 몸만 가면 되는 것이요, 나아가서 마음만 잘 지니고 가면 된다. 마음을 잘 지니려면 몸 밖의 것은 다 버려도 된다. 어쩌면 다 버려야만 구법 여행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운명 상담을 해주는 과정에서 철저히 깨달은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직장인 중에 먹을 거 어느 정도 챙겨놓고 도 닦겠다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상담 꽤나 해 주었다.
한의대를 가겠다, 로스쿨을 가겠다, 귀농하겠다, 캐나다로 가겠다, 유학을 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자유롭고 싶은 것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픈 것임을.
하지만 자유롭고 싶다는 것 역시 그들의 소망을 정확하게 나타냄도 아니다.
‘자유’라 말하면 뭔가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자유란 것이 대단히 소극적 관념이란 것을 모르고 있음이다.
자유란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아니다. 자유란 그냥 자유가 아니라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목마름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등등 자유는 겨우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 뿐이다.
정말이지 자유는 별 게 아니다. 자유가 창조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근대 서구 정신이 자유를 엄청 강조했지만, 신분제 사회를 벗어난 오늘에 와서 자유는 제 역할을 마쳤다. 창조를 담보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진지한 갈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겨우’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갈구하고 있지 않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무엇 내지는 상태인 것이다.
이에 옛 선인들의 말을 빌면 ‘영원하고도 확고한’ 그 무엇이다. 결국 당신이 원하는 것은 불멸의 확고한 것이고 그를 위해 길을 찾고 또 묻는 것이니 길은 바로 ‘道(도)’인 것이다.
그래서 길을 떠나겠다는 젊은이들을 만나면 너무 개의치 말고, 먹을 것 재어둔 연후에 떠나려 하지 말고 그냥 떠나라고 얘기해준다.
물론 이 글을 쓰는 호호당 역시도 깨달음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길을 떠난 지 제법 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호호당의 그간 상담은 길을 조금 먼저 떠난 선배로서 일종의 求道(구도)컨설팅이었다고 하겠다.
그냥 떠나라는 말, 잘 믿기지 않겠지만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기인데, 그냥 떠나라고 해서 처자식 다 버리고 떠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럴 바에야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나를 버리는 희생의 마음이 차라리 백배는 더 아름답다. 다 버리고 떠난 도상에서 버려진 강아지 만나 길동무 하는 영화 찍지 말고, 애초부터 처자식을 강아지 삼아 동고동락함이 더 옳다는 얘기.
어쨌거나 도를 닦으려면 다소간에 배짱이 필요한 법.
스승들도 깨달음을 얻겠다고 불원천리 찾아온 제자를 공연히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담력 시험을 해본다. 다 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이 점 또한 좋은 사부들의 한결같은 시험이라 하겠다.
百尺竿頭(백척간두)에 進一步(진일보)란 말이 압권이다.
백 척이면 30 미터이고 그런 높은 장대 위에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텐데 거기서 허공으로 한 발 더 나아가라는 것이다.
옛날 박찬호 선수가 LA 다저스 시합에 처음 등판했을 무렵, 박찬호는 너무 기가 죽어서 자신의 공을 던지지 못했다. 그러자 라소다 감독이 불펜에서 큰 몸짓과 함께 ‘괜챦아, 무조건 직구로 가운데를 향해 힘차게 뿌리란 말이야’라고 주문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유명한 엽기 전설 하나 더 소개한다.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달마는 숭산 소림사에 좌판을 벌려놓고 고기를 구워대며 부채질로 냄새를 풍겼다.
이에 법을 구하는 사람이 찾아와 졸라댔으니 내심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래도 짐짓 모른 척하며 좌선에 들어있었고, 그 사람은 떠나질 않았다. 때 마침 눈이 내렸다. (무대미술 좋다!) 그 사람은 떠나지 않고 눈 내리는 밤을 꼴딱 새웠다.
아침이 되자 달마는 말한다. “팔을 하나 잘라서 굳은 마음을 보이던가.”
이에 그 사람은 잠시 생각했다. ‘할 수 없구나, 수업료 졸라 쎄네, 내 그럴 줄 알았어, 우-씨’ 하고 자신의 왼쪽 팔을 싹둑 베어서 바쳤다고 한다.
입문 과정에 대한 최고 엽기 전설, 또는 믿거나 말거나의 사실.
(불경죄를 지었으니 글을 마치면 합장하고 ‘정구업진언’ 백번 하겠습니다. 방편설로 널리 이해하시길 부처님!)
그러자 달마가 그 사람에게 기껏 붙여준 법명이 慧可(혜가)였다. 팔까지 자른 단순무식한 놈이니 ‘지혜를 얻을 순 있겠구나’ 정도의 의미.
이 혜가는 달마에 이어 선종의 제 2대 조사가 되었다.
아무튼 ‘양사’라는 양반들치고 독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허기사’ 그럴 때 아니면 언제 ‘끗발’을 부릴 수 있으랴!
‘한’ 무술 하려고 소림사 들어가도 처음에 시킨다는 것이 고작 燒火運水(소화운수), 장작 패고 물 긷는 거 3년은 기본이다. 나중에는 장작 3년, 물긷기 3년이 되었다는 ‘썰’도 들려온다.
(요즘처럼 인권사상이 발달한 시대라면 착취로 하여 즉각 소송감이고 무료변호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거 다 나름 이유가 있다. 좋은 선생들이 제자들을 그냥 부려먹기 위함은 아닐 터, 사부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지 부터 확인하기 위함이고 다음으로 바탕을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3년이 지나면 그 때부터 겨우 가르쳐준다는 것이 정권 찌르기와 앞차기, 이 또한 하루에 각각 1 천번씩 해서 십만번을 찌르고 차면 석달이 되는데 이때부터 기껏 고급기술이랍시고 하는 것이 비껴 지르기와 옆차기로 이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산해서 동네 녀석들 깡그리 패주냔 말이다.
이 과정을 잘 묘사하면 그 소설 반드시 돈이 된다. 이미 돈이 된 소설도 부지기수!
신진 작가들은 좋은 테마와 소재를 찾는데 사실 별 거 아니다. 성공한 책들을 잘 분석해보면 죄다 공통점이 있으니 ‘고딩이’ 수준을 넘어서지 말고 주인공이 어려움 속에서 커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면 바로 대박이다.
그런 다음, 고딩이 수준을 약간 넘어서는 글을 쓴다. 물론 팔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희생타일 뿐 실패는 아니다. 나름 예술성을 인정받기 위함이다. 그런 다음에 약간 인터벌을 두었다가 다시 고딩이 수준으로 돌아와 책을 쓰면 마스터가 된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추었다는 평과 함께 大家(대가) 소릴 듣는 것이다. (이거 내가 너무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최인호 씨의 ‘상도’가 그렇고 허준 드라마도 그러하며 무협소설계통에는 엄청 널렸다. 이런 종류를 대개 ‘성장소설’이라 한다. 한석봉은 글을 쓰고 엄마는 떡을 써는 게임도 그런 종류, 떠오르는 것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영화 ‘우생순’이 바로 그런 케이스란 점만 지적해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도를 닦는 이가 원래 혼자 가출해서 입산수도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나서 사부를 만난 경우라면 비교적 그 과정이 짧지만 애초부터 ‘쌩’으로 사부 문하로 들어온 경우라면 ‘씨게’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다.
기가 넘치고 재주가 있다면 입산수도하다가 사부를 만난다. 주로 발칙형 또는 천재형에 속한다 하겠다.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사부를 만나 열심히 내공을 닦는다면 ‘범생이’ 형에 속한다. 대학원생이 지도교수님 라면 끓이고 담배 심부름 하듯이 그렇다. 라면 사올 돈마저도 안 주었다는 얘기도 듣긴 했다.
주로 크게 되는 스타일은 역시 ‘발칙형’인데 이런 이는 나중에 主敎(주교)가 아니라 敎主(교주)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는 얘기.
사이비 교주라면 모를까 진짜 교주는 엄청 고생을 한다. 제 1 대를 우리말로 開山祖師(개산조사)라 한다.
산을 연 할아버지 스승이란 의미인데 알고 나면 이거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다.
산을 연다는 것은 이렇다.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산을 하나 발견했다. 그러면 거기에 일단 움막을 하나 짓는다. 움막에 도달하려면 도중의 길도 내야 한다.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도 아닐 터, 혼자 밟고 다니면서 길을 만들어야 하니 얼마나 고생인가.
산만 열면 다행이게, 더러 생고생하다가 제자가 배신 때리는 바람에 십자가에서 엄청 피 흘려야 했던 예수님도 있다. (오, 주를 제가 믿나이다, 아멘.)
개산조사 중에 그나마 가장 편했던 이는 아마도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였을 것이다. 부유한 아내의 내조로 돈 고생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긴 끝에 빛을 봤다.
돈 많고 이해심 많은 연상의 아내를 만나는 것도 깨달음에 도달하고 그로서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참조하시길.
이러니 저마다 목적지는 같아도 길은 다를 수 있다고 호호당은 말하고 싶다.
이제 양사를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해서 진짜 도를 깨쳤다고 여기면 아직 착각이다. 그것이 진짜인지 먹히는 것인지는 검증해봐야 아는 일. 저번 글에서 계룡산 바둑도사가 대전 한국기원에 가서 검증을 하다가 개피를 봤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코스는 제 4 코스로서 江湖出頭(강호출두).
아직 갈 길이 멀기에 다음 회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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