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세기에 있었던 엄청난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두 번째 대목에 관한 얘기이다. 그것은 陣營(진영) 또는 ‘편’의 논리이다.
무협소설을 보면 싸우는 논리가 참 간단하다. 검객이 길을 가다가 모르는 무인을 만나자 묻게 된다.
“넌 어느 쪽이지?”
“난 黑道(흑도), 그러는 너는?”
“난 白道(백도), 좋아 칼을 뽑아라.”
그리하여 챙챙챙, 으악!, 이런 것이 무협소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진영논리 때문이다.
개인 간의 갈등은 시비를 꼭 밝히지 않아도 넘어갈 때가 많다.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하며, 또 좋은 것이 좋은 거지 뭐 하면서 말이다. 개인 간의 법정 송사는 변호사들만 신이 난다.
그러나 조직 간의 갈등은 사정이 쉽지 않다. 처음에는 이치를 밝히기도 하고 양보와 타협도 하지만 어떤 계기에 내부 강경론자가 힘을 얻으면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서로 간에 말발이 좋은 사람이 나서고 그것이 시원치 않으면 다른 이가 나서 또 역공을 펼친다. 대결이 펼쳐지면 조직은 개인과는 달리 더 잘 싸우기 위해 조직을 바꾸게 된다.
이러면 유화론자는 비겁한 것으로 몰리고 타협하자는 이는 신념이 없는 자로 낙인이 찍힌다. 그런 정서가 대결 구도에 있는 두 조직 모두 충만하면 그 때부터는 본격 대결이 된다. 서로 자신이 있으면 그런 것이니 이것이 더 문제가 된다. 자신이 있다는 것이.
말발이 좋고 강경하게 나가는 이가 득세를 하고 권력을 얻게 되면, 나머지 조직원 중에 더 센 강경론을 들고 나서면서 내부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너 비켜, 내가 한 방에 끝낼 수 있으니’ 식으로 간다.
전통이 있고 원로가 있는 조직은 이런 막가파식 싸움에서 그나마 발을 뗄 수 있지만, 신생 조직은 그러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조직 간의 싸움이 또 다른 제 3의 조직을 끌어들이면 그 때는 더 이상 통제불능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란 논리가 들어서면, 이제 다수 대 다수간의 싸움이 된다. 이른바 會戰(회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조직, 조직이 아니라 조직연합이 생겨나면 사실 조직 사이의 통신도 어렵다. 통신이 어려운 데, 뜻을 통일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다보면 단순하고도 과격한 주장이 세를 얻는다.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부각되는 지점이다.
가령 언제까지 어떻게 하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면 저렇게 하고 식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조건 백기 항복할 때까지 싸운다는 식으로 방침이 정해진다.
조직 내부의 권력 투쟁이 있고 조직 간의 권력 투쟁이 있으니 이제 상대진영과의 타협은 완전 물 건너간 셈이다. 그냥 ‘싹쓸이할 때까지’가 방침일 뿐.
엄청난 희생이 생겨나지만 그 모든 원인과 잘못은 항복하지 않는 상대 진영에게 있을 뿐이다. 상대가 백기 투항하지 않기에 희생이 생기고 있다는 식으로만 해석된다.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서로간의 증오는 더욱 증폭된다.
모든 희생과 인내는 오로지 승리를 통해서만이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지루하고도 철저한 소모전이 전개된다. 그만 싸우고 싶어도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조직을 이끄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말을 못한다.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을 믿고 이 고생을 참았는데 중도에서 그만 두다니 하는 반발이 두려워 그저 필승만 다짐할 뿐이다.
힘들지만 끝내 승리하지 않으면 어떤 무엇도 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모두를 싸움의 화신으로 만들어놓는다.
이런 싸움은 어떻게 결말이 나는가?
대개의 경우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사소한 요인이 부각되고 그로서 한 쪽 진영이 와해되면서 마무리된다. 진 쪽이나 이긴 쪽 모두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 의외의 사소한 일로도 그렇게 된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일이 생겨나면서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어지면서 마무리된다.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다, 그저 그간의 희생만 있는 결말이다.
진영 논리가 지배하면 이렇게 된다. 누구도 진영 논리를 거스를 수 없다. 그저 승리만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이 이끌어가는 싸움은 이렇게 결말이 난다.
애당초 전력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장기에 걸친 싸움이 되고, 끝이 나도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그저 상처만 남을 뿐이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무엇이 돌아갔는가? 사실 아무 것도 얻지 못했고 그저 제국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강자의 부상을 지켜보아야 했다.
미국과 소련간의 수십년에 걸친 대립은 소련을 와해시켰고 미국이 승리했지만 미국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저 ‘일방주의’라는 오명만 손에 쥐었을 뿐이다.
이처럼 그냥 싸움이 아니라 장기간의 싸움은 어리석다. 하지만 조직하는데 능한 인간은 본성상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어리석음은 되풀이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인간에 대한 절망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앞 세대의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교훈을 얻으면 뒷 세대는 번영할 것이고, 번영 속에서 다시 어리석음과 오만이 움트면 다시 싸우고 망하는 흐름이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평화와 공존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비싼 것이다.
평화는 전쟁 사이의 幕間劇(막간극)이고, 전쟁은 평화 사이의 막간극이다.
우리 역시 2002년 壬午(임오)년부터 참 치열하게 싸워왔다. 모두가 넌더리를 내고 있다. 어느 신문이든 방송이든 평론성 기사는 제목만 보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인터넷 논객들의 말에도 이젠 새로운 무엇이 없다. 그저 비방만 하고 있을 뿐이다. 선동도 더 이상 먹혀들지를 않는다. 백신을 수 십 차례 맞은 결과 어느 진영의 어떤 말에도 움직이질 않을 정도의 면역력이 생겨버렸다.
이 말하면 저 말로 답하고 저 말하면 이 말로 답하는 것이 이젠 아예 프린트 유인물로 問題銀行(문제은행)처럼 시중에 돌아다닐 정도이니 사실 이제 더 이상 싸움을 통해 해결될 수 없음이 명백하건만 그저 관성으로 싸우고 있다.
스스로는 멈출 수가 없기에 누군가 제3자가 멈춰주어야 한다. 마치 잔뜩 잠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장난감을 들고 억지로 놀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다. 이럴 때 엄마가 한 번만 살짝 안아서 눕혀주면 그대로 잠들 터인데.
물론 싸움의 원인이 된 문제 중에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싸움의 원인이 된 문제는 결국 서로 협조하고 마음을 같이 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기에 그렇다. 이 대목이 실로 중요하다.
그러니 싸우는 진영 스스로가 싸움을 멈출 때에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니, 현 시점에서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것은 싸우고 있는 양 진영 스스로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현실의 逆說(역설)이다.
정치라곤 전혀 문외한인 일반인이 보기에도 이젠 힘들고 지루하고 지겹다. 마치 슬로 모션이 멋있다고 영화 전체가 슬로 모션만 되풀이되는 영화 같고, 플롯은 무협소설보다 더 단순한 액션 씬만 가득하다.
2002년에 본격화된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에는 놀랍게도 최종 라운드가 존재한다. 야구나 축구가 아닌데 어떻게 최종 라운드가 있냐고 의아하겠지만, 놀랍게도 최종 라운드는 존재한다.
10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예이, 그런 고리타분한 옛 말이라 여기지 말라, 엄청난 강제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2012 년이면 만 10 년이 되고 무조건 끝이 난다. 승자는 없다, 모두 패자만 남을 것이다.
왜 승자가 없을까? 모두 권고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권고 규정은 6 년이다. 2002 년에서 6 년을 더하면 2008 년인데, 그것이 자연의 순리가 권고하는 최종시한이었다.
남녀 애정도 6 년이면 권태기가 오고 세상 만물이 6 년이면 한계에 도달한다. 지금의 싸움은 아직 미련이 남은 사람들을 위한 뒷풀이라 하겠으니 남은 술잔을 비우고 자리를 뜸이 마땅하리라.
그리고 8 년이 되면 청소부가 나타난다. 그러면서 ‘아직도 술을 드시고 계시우’ 하면서 빗자루로 먼지를 날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2010 년이다. 이제 더 이상 손님 대접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파티 장의 전등이 꺼지면 2011년이고 2012 년에는 빗장 지르는 쇳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싸움이 끝나면 새로운 흐름이 나올 것이다. 天機(천기)는 어김이 없다.
‘소오강호’란 김용의 소설이 생각난다. 江湖(강호)의 是非(시비)를 웃음으로 넘기고 자신의 길을 간다는 제목이다.
다음 글에서 배워야 할 마지막 교훈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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