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협영화 감상기--무협시리즈 제4회  _  2009.5.4
무협영화는 근본적으로 홍콩 영화를 말한다.

그 핵심에는 영화사 ‘쇼 브라더스’가 있다. 낯설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쇼 브라더스의 전성기가 바로 홍콩 무협 영화의 전성기였으니 1966 년 ‘대취협’-국내개봉시 ‘방랑의 결투’-으로 시작하여 1976 년 ‘유섭호접검’에 이르는 시기가 된다.

무협영화는 물론 그 뒤로도 부단히 변모하면서 리안의 와호장룡과 주성치의 쿵푸 허슬, 그리고 ‘칠검’에 이르고 있다.

1955 년생인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중학교 입시로 여념이 없었지만 동네 노는 아이들로부터 신기하고도 끝내주는 홍콩 무술 영화가 들어왔다는 얘기를 건네 들었다.

하늘을 날아,
작대기로 바위를 찍으니까 바위 속까지 푹-하고 들어가는 거 있지,
손바닥에서 바람이 나와서 사람을 날려버려,
악당이 엄청 강해서 주인공들이 함께 덤벼들더라, 겨우 이겨,

이런 얘기들이 공부에 바쁜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보았던 우리나라 활극영화에 비해 분명 또 다른 차원의 재미가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조바심이 났지만 참아야 했다. 입시 때문에.

시험이 끝나자 다음 날 나는 당시 ‘3류 극장’, 그러니까 개봉관에서 한 것을 또 돌리고 마지막으로 또 돌리는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상영 중이었다.

완전 얼이 빠진 상태로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며 극장을 나선 뒤 어느새 하늘을 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잠들 때까지 온통 무술 공상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하여 홍콩 무협영화와의 길고 긴 애정행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애정행각이 시작되었으니 중학교 1학년 봄이었다. 동네 만화방에 가니 형들이 ‘무협지’-당시에는 무협소설이라 하지 않았다-를 빌려가는 것을 보고 그게 무어냐고 물어보니 만화방 아저씨는 이건 한자가 많이 나와서 어려운 것인데 네가 볼 수 있겠니 하는 것이었다.

물론 볼 수 있지요 하고 빌려왔다. 읽어보니 홍콩 무술영화 ‘저리 가라’였다.

심취 또 심취였다. 재미난 영화는 몇 달을 기다려야 개봉하는 바람에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지만 무협소설은 읽기가 바쁘게 새로운 것이 나왔다.

중학교 1학년 무렵은 참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그 해 처음으로 옆자리 짝꿍을 통해 남녀가 흉측한 짓을 해야만 아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부모님을 대할 때마다 속으로 ‘아니, 저 더러운 것들이’하고 민망스럽던 시절이다.

이어서 급우로부터 ‘자위’를 배웠고 ‘빨간 소설’도 접하게 되었다. 처음 정액이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이 고름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병에 걸렸구나 하는 번민으로 며칠 힘들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자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통증이 없길래 친구들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고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나날이 자위의 숙련도가 높아져갔다.

무협지에 주인공 남녀의 정사 장면이 나오면 그 날은 자위하는 날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불쑥 방에 들어오시는 것에 엄청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아무튼 중1 시절은 나에게 있어 여러모로 혁명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있었고 젊은 제국주의자처럼 마구잡이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침탈해갔다.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동네 여탕에 들어갔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왜 물장난만 치고 주변의 그 널린 여인의 몸들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고 통탄했다.

그러나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은 나는 지금도 당시 읽었던 무협지들의 주인공과 사건 전개, 무술 초식 이름 등등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 물론 어릴 적 여탕에서의 기억은 물장난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데 재미난 점은 당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무협지를 본다고 얘기했다가는 야단을 먹었다는 사실이다. 무협지는 ‘빨간 소설’ 다음으로 금서였던 것이다.

홍콩 무술영화가 당시 우리 국민들을 절정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든 계기는 ‘왕우’라는 배우의 등장이었다. 훗날의 ‘이소룡’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사실 멋이나 ‘폼따구’는 왕우가 한 수 위였다.

그림 특히 만화를 잘 그리는 나는 매일 노트와 종이, 참고서 여백마다 온통 왕우의 액션 장면으로 채우기 바빴다. 나의 인체 동작에 대한 소묘실력은 그 때 이미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누드 크로키’같은 것을 좀 해본 적도 있지만 이미 더 연마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왕우는 ‘외팔이’(원제 독비도)와 그 속편인 ‘돌아온 외팔이(원제 독비도왕)’, ‘단장의 검’ 등을 통해 당시 중고등학생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피가 낭자한 무술영화에 우리들의 피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러나 왕우의 영화 중에서 가장 걸작은 ‘심야의 결투’-원제목은 ‘금연자’-였다. 수백명이 왕우의 칼에 쓰러지고 자빠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왕우가 걸친 하얀 적삼이 온통 피로 물들면서 비장미를 완성시켰다.

물론 우리 또래들은 모두 ‘개뻥’인 줄 알면서도 전율하고 또 전율했다. 심지어는 교실 내 급우들 앞에서 새로 산 하얀 셔츠에 빨간 잉크를 부어 왕우의 장렬한 최후를 연기한 적도 있다. 물론 집에 어머니한테는 잉크를 쏟는 바람에 그랬다고 둘러댔고 망친 새 옷은 그냥 버려야 했지만 급우들 사이에서 나는 한동안 인기가 짱이었다.

나이가 든 다음에도 늘 왕우의 영화가 보고팠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부천국제영화제에서 홍콩영화를 상영했던 적이 있었고 당연 보러갔다. 밤을 새워 ‘방랑의 결투’와 ‘심야의 결투’ 등을 보면서 즐거웠다.

밤새 내가 보았던 것은 ‘왕우’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鄕愁(향수)란 결국 ‘옛날의 자화상에 대한 그리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50 이 넘은 나에게 영화 속 왕우는 그저 젊은이였고 아이였으니.

물론 무협영화와의 애정행각은 그 이후로도 변함이 없었고 쉬흔 다섯이 된 지금에도 열이 다소 식긴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수백편의 무협영화를 보았고, 영화평론하는 사람들의 글도 제법 읽었다.

평론을 읽다보면 약간 웃기는 점들이 있다. 자신의 생각이 마치 정답인양 애기한다는 점이다. 주관은 어차피 편견인 것이니 답을 내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이 또한 편견이겠지만)

영화가 있다, 소설이 있다, 만화책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평론들이 있다. 앞의 것들이 主(주)라고 한다면 평론은 客(객)일 뿐이다. 평론은 그저 ‘파생상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객이 주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가령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가장 우선에 놓는다. 그 다음에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고, 영화를 공부한다는 사람은 다음 다음이며,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놓는다. 그러니 영화평론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인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다고 여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영화감상기일 뿐, 결코 평론을 쓰고자 함이 아니다.

혹시 이 말에 열을 받으신다면 그저 호호당이란 사람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
다음 글에서 ‘나의 무협영화 감상기’를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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