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대야에 손을 씻다, 金盆洗手(금분세수)--무협 시리즈 제3회  _  2009.4.26
무림에서 출세했던 고수가 여러 사람들을 초빙하여 그들 앞에서 금으로 만든 대야에 손을 씻음으로서 무림을 은퇴하는 행사, 바로 금분세수이다. 무협작가 김용의 걸작 ‘소오강호’ 앞머리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김용 역시 1924 년생으로 58 세 되던 1972 년,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금분세수를 했고 어느덧 삶을 마감해가고 있다.

금분세수, 성공했으니 황금대야에 맑은 물을 부어놓고 그 물에 손을 씻는다. 무림의 일이란 것이 모두 은혜와 원수이니 이제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연하지 않고 그간 손에 묻혔던 피를 씻어낸다는 의미의 행사.

오래 전 소오강호를 읽으면서 금분세수란 이 말이 제법 그럴듯하다는 인상을 얻었다. 그런데 문득 왜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가? 바로 우리 대통령들, 특히 최근의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이라 하겠다.

打破黑手神功(타파흑수신공)으로 일거에 天下武林(천하무림)을 평정했던 破天荒(파천황)의 무림고수 노무현, 명문정파 출신이 아니었기에 ‘검은 손만을 전문적으로 깨어 부시는’ 절정의 신공은 한 때 중원 무림을 진동했다.

그런 그가 금분세수하고 봉하 마을에 莊園(장원)을 짓고 지냈지만 그 역시  과거 무림에서 맺은 은원 관계를 일거에 씻어내기란 실로 어렵구나 싶다.

그리고 그의 成名絶技(성명절기), 이름을 빛내게 된 절정의 기술인 ‘타파흑수신공’에도 허점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간의 명성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소오강호’에서 금분세수를 했던 형산파의 고수 유정풍이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았듯, 노무현 역시 그 이전에 무림을 제패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과 김대중 등의 절정고수들이 걸어간 비극적 행로를 되풀이하고 있다. 原型(원형)은 시간 속에서 부단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확인시켜주는 법일까?

이 원형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서 이미 그 모습을 보였고 소오강호에서도 재현되었으며 현실의 세계인 2009 년 대한민국에서도 또 다시 재현되고 있다.

이미 인간들은 피를 보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는 방법을 개발해낸 지가 오래이다. 바로 다수결 투표를 통한 권력의 이양이니 이 방법을 개발하고 정착시킨 것은 영국 사람들이었다. 의원내각제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이후 세월을 거듭하면서 보통선거가 정착되었고 나중에는 성인인 경우 여성까지도 투표권을 주는 참된 의미에서의 보통선거 제도가 정착되었다.

나는 이 대목을 인류사의 위대한 발전이라 여긴다.

권력이란 사회적 조직을 만들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떠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권력이고 그 권력의 구체화가 법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권력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방법을 알아내는데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렀다. 권력이 넘어갈 때는 어김없이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권력으로 해서 자신의 아들마저도 뒤주에 가둬놓고 굶겨 죽여야 하는 사도세자의 비극도 있었다.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인류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제도, 그 핵심에 놓인 ‘보통선거’야 말로 무혈 권력이양의 방식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은 권력을 넘기는데 더 이상 피를 보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광재 의원이 자연인으로 돌아갈 터이니 더러운 게임을 끝내자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픈 한편에는 역사의 발전을 느꼈으니 ‘아니러니’라 하겠다.

아무튼 이제 투표를 통한 대통령의 선출에 더 이상 정통성 시비를 거는 자는 없게 되었다.

오늘에 와서 새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반대 표시의 극한이  2008 년 촛불 시위였다. 한 때 그 일로서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 정도의 사회적 비용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투표를 통한 권력의 정통성이 충분히 공고해졌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는 것에 비하면 저렴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번 노무현의 은퇴 후 되풀이되는 비극, 무림을 은퇴해도 여전히 무림에서 떠나지 못하고 또 다시 어렵게 되는 일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고전적 원형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봉하 마을에 장원을 짓고 은퇴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일부 미미한 문제는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무림의 일에 관여를 지속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러간 전임 무림맹주는 적어도 5 년 정도, 무림의 일에 일체의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싶었는데 말이다.

아직 우리 정치는 정권이 넘어갔을 때의 상황을 처리하는 기술이 정권을 내놓은 측이나 되찾은 측 모두 경험이 일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좀 더 성숙된 권력이양 이후의 절차에 대해 양자 모두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었지 않은가 한다.  

이번 일에 대해 ‘생계형 범죄’라고 옹호한 사람도 있는데,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실언이었다 싶다.  

우리의 대통령에게 생계형 범죄라는 말은 변호나 옹호의 효과는커녕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전임 대통령이 ‘좀도둑’이었다는 것이고, 우리 국민은 지지 여부를 떠나 지난 5년 동안 좀도둑의 통치를 받았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나라의 품격, 國格(국격)을 생각할 때 너무 심한 얘기가 되지는 않겠는가 말이다. 다시 한 번 속이 상하는 일이다.

다시 무협의 세계로 돌아가보자.  

무협소설은 대부분 시대적 배경이 불확실하다. 이른바 역사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에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무협소설을 정통 문학에서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껏 환타지 문학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시대적 배경이 없다는 것, 역사성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무협소설이 지닌 독특한 힘이라고 여긴다.

무협소설은 인간 보편의 내면적 의식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역사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본다.

은혜와 원수는 쉽게 말하면 권력과 금전, 본질적으로 먹을 것을 놓고 얽혀드는 인간의 세계이며, 동시에 먹는 것만이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義俠(의협)을 통해 삶의 전범을 보여준다. 물론 그 속에는 남녀의 사랑과 역경을 통해 성장해가는 성장소설적 요소로 가득하다.

판타지이지만 실은 판타지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금분세수를 했으면 문자 그대로 평화롭게 노후를 즐기면서 경험과 지혜를 후진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성숙한 우리 정치의 마당이 도래하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친다.

다음 번에는 좀 더 무협소설의 구조에 대해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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