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至(하지)의 사랑싸움  _  2009.6.23
해맞이로 찾아간 석굴암, 그러나 토함산은 연무를 짙게 둘러 해를 보여주지 않았다. 순간 서운한 마음에 석굴암 부처님을 건성으로 대한 것이 돌아오면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부처님은 토라져 돌아가는 제자를 어떻게 느꼈을까? 본디 속 넓은 분이니 경상도 사투리로 ‘아따, 자슥, 그래, 다음에 또 온나, 그 땐 내 토함산 신령하고 타협 좀 봐 놓을 게’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 잠시 훔치듯 부처님을 보고 돌아서 나왔지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 찰나의 모습과 자태가 무척이나 내내 아름답게 다가오는 바람에 속 좀 앓아야 했다.

여느 때보다 턱이 좀 짧은 듯도 했는데 그 모습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로 나오면서 이번 일로 인한 갈등은 사실 사랑싸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젊은 시절, 누구나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애인과 사소하고도 치사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그래, 이제 끝장이야, 그만 만낫!’ 하고 돌아섰던 경험, 그래서 잠시 반대 방향으로 씩씩하게 걷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아보니 뒷모습만 보이는데, 헤어지기 직전 약간 짧아보이던 그녀의 턱이 귀엽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져 다시 부르자니 민망하고 안 부르자니 또 그렇고 하던 시츄에이션.

그랬다. 그러니 내년 하지 때에 다시 찾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한다.

석굴암 얘기가 나왔으니 얘기 좀 하려한다.

석굴사원은 인도인들이 만들었다. 석굴사원은 사실 어머니의 뱃속이다. 태어난 모든 이들은 그곳을 떠난 것을 후회하며 살아가니 잠시나마 그곳으로 돌아감을 허락해주는 곳이 석굴사원이다. 고마운 곳이다.

그런데 경주 석굴암은 여러 사정상 입구를 유리로 막아놓았다. 십분 이해하지만 찾아갈 때마다 같은 아쉬움을 반복한다.

원래 석굴사원은 그 안에 탑을 모시기도 하고 때로는 승려가 도를 얻기 위하여 기어들던-이 말은 욕이 아니라 본질을 말함이다- 수행의 장소였다.

석굴사원은 빛이 만들어내는 낮과 밤을 차단하여 시간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준다, 석굴사원 안에서 시간은 하등의 필요가 없으며 아예 존재하지도 않으니 영원으로 이어진다. 어머니 뱃속도 그럴 것이다.

석굴사원의 구조는 위에서 볼 때 호리병 모양이다. 중간이 오목한 구조인 바, 이는 마지막 관문의 역할 또 들어가면 세상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서 俗(속)과 聖(성)을 나눈다.

경주 석굴암은 유리로 막혀있어 아쉽지만, 세계 제일의 석굴사원임에 틀림이 없다.

먼 옛날 인도에 많은 석굴사원이 지어졌고, 불법도 흥성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자 그 흐름을 감지한 큰 스님들은 불법을 사방으로 전파했다. 서로 간 불법은 소멸되었고 동으로 간 불법은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인도와 서역의 스님들이 마케팅에 나섰지만 나중에는 중국과 신라  쪽에서 제 발로 불법을 구하고자 험한 길을 찾아왔다. 사막을 횡단하고 험한 준령을 넘어야 했으니 열에 아홉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 求法(구법)의 장정이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실크로드의 길목인 돈황과 운강, 용문 등지에 점차로 석굴 사원이 들어서면서 불법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 길고 긴 수만리에 걸친 法脈(법맥)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북단 다시 한반도의 동남단 끝자락 감포 바다를 바라보는 경주 토함산에서 마침내 穴(혈)자리를 얻었으니 곧 석굴암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아득한 기운의 흐름이 토함산 자락에 와서 멈추었다는 점이다. 미술과 건축 양식이 어떻다는 식의 섣부른 얘기는 귓전에 아예 들지도 않는다.

다시 내 눈은 길을 거슬러 저 멀고 아득한 저편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고개와 개천, 사막을 걸었던 구법승들의 발자취를 좇는다.

오게 하고 가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점이 그저 신기하고 불가사의할 뿐이다. 그러니 부처님 사랑합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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