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신이 내린 선물(하)--역사 이야기 시리즈 제5회  _  2009.5.26
수도를 다마스커스로 했던 우마이야 왕조에서 압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로의 이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본다.

당초 정복국가를 세운 아랍인의 수는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인도해 준 하나님의 뜻으로 저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게 살고 싶은 법이니, 이제 정복전쟁을 그만 두고 정복지의 피지배민들로부터 약간의 인두세와 토지세를 거두기만 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세금을 아랍인 모두에게 연금의 형태로 골고루 나누어 가졌고 이로서 풍요로운 삶을 이어갔다. 지상낙원이 건설된 것이다.

넉넉한 연금을 받는 대신 아랍인에게도 납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무가 있었으니 희사와 기부를 해야만 좋은 이슬람이 된다는 교리 때문이었다. 살림살이도 풍족하니 그런 의무마저 등질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꾸란에 의하면 그 누구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슬람이면 한 형제이니 형제로부터 인두세와 토지세를 내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지배를 받던 여타 사람들도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칼이냐 꾸란이냐를 강요했다는 말은 그러니 진실이 아니다.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같은 대우를 했지만, 비 아랍 이슬람이 갈수록 늘어나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세수는 줄어들고 연금 지급은 늘어났던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가 몇 년 사이 국민연금 문제로 논란이 많았던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하겠다.

당초의 지상낙원이 피지배인들의 세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개종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었고, 허용하더라도 차등을 둘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나왔으며, 특별한 사람의 추천에 의해서만 개종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럴 때는 언제나 큰 목소리가 이기는 법, 정부는 급기야 개종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수많은 율법학자들이 꾸란의 말을 교묘하게 해석하여 그런 조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참고로 이와 유사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든다.

칭기스칸은 죽을 때 형제간에 피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유언했다. 그러나 권력을 향한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들은 칭기스칸의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기교를 부린다.

혈족이지만 내전에서 패배한 반대파를 죽일 때 거적으로 둘둘 말아서 그 위로 말들을 달리게 해서 압사시켰다. 물론 피 한 방울 새어나오지 않았다. 또 창을 등 뒤로 걸어서 허리를 부러뜨려 죽였다. 물론 피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와서 교리해석 과정에서 다시 찬성과 반대가 생겼고 이슬람은 더욱 분열해갔다.

정부가 개종을 막긴 했어도 순박한 아랍 이슬람들은 그들의 개종을 강력하게 막지 않았다. 자신의 연금이 그들로부터 나오건만 그리하여 개종이 많으면 연금도 줄어들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순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일반 아랍 이슬람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개종을 막지 않았고, 또 국고는 엄청나게 풍부하다는 생각, 권력자들이 조금만 근검절약해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 아랍 이슬람의 숫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 이슬람의 숫자를 넘어서게 되었고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온 사회는 이쪽도 불만, 저쪽도 불만이었다. 특히 원래 문화민족이던 페르시아 사람(오늘날 이란)들은 비주류인 시아파 사람이 대부분으로 반체제 운동의 거점이 되어있었다. (참고로 주류 이슬람을 순니파라고 한다.)

뭔가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부 역시 불만 계층을 다양한 방법으로 달래는 무마정책도 펼쳤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갔다.

이에 불만과 원성을 이용하여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 우마이야 왕조의 혈연관계였던 압바스 왕조였다.

막상 대권을 잡긴 했으나 압바스 가문이라고 뾰족한 수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압바스 가문의 제1대 칼리프는 살육자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먼저 그간 자신의 반란을 도와준 페르시아의 시아파 사람들을 대거 살육했다. 파이는 한정이 있으니 결국 사람 숫자를 줄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페르시아의 교양인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시켜 행정의 효율을 높이고 불만을 어루만졌다. 아랍 인들은 유목민이라 행정 처리에 능숙하지 않았다.  

수도를 페르시아 방면으로 옮긴 것도 바로 이런 정책적 고려였던 것이다.

한편 원 아랍 이슬람이든 개종 이슬람이든 토지가 있으면 공히 토지세를 내게 했다. 그리고 개종하지 않는 기독교도나 유대교도는 토지세는 물론 인두세도 내게 했다. 현실적이고 불가피한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아랍 이슬람 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불만이 터져 나왔을 것은 당연지사. 이에 제 2대 칼리프인 만수르는 가차 없는 살육으로 대응했고 얼마 가지 않아 불만은 잦아들었다.

애초부터 우마이야 왕조든 압바스 왕조든 종교적인 차이로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은 없었다. 이슬람은 열린 종교였던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기독교나 유대교를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 생각이나 교리가 약간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을 믿으면 된 것이지 하는 생각이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러면 ‘스스로 손해지 뭐’ 하는 정도였다.

그 실례로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프는 비서실장이 기독교 신자였다. 또 압바스 왕조는 왕비를 주로 페르시아의 교양 귀족 가문에서 간택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나자 상층 권력 계층에서 사실상 아랍과 페르시아 간의 차이는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압바스 왕조가 동쪽의 바그다드로 수도를 잡은 다음, 재정의 건전성을 위해 착안한 것은 다름 아닌 교역이었다.

그래서 바그다드에 중앙 시장을 열고 전 세계로부터 특산물과 귀중한 물품들을 실어오고 또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약간의 통행세를 받았고, 또 왕조 자체가 교역 사업에 뛰어들어 부를 일구었다.

그리고 칼리프의 모습도 당초의 소박한 종교 지도자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페르시아식의 철저한 황제로 변모해갔다.

접견하는 신하와 사신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칼리프의 밑자리에는 언제나 서슬 퍼런 도끼를 든 망나니 사형집행인을 상주시켰고, 또 그 망나니가 엄한 짓을 할까봐 다른 궁수와 무사들이 황제의 휘장 뒤에 도사렸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는 성공하였고 750 년에 건립된 이래 500 년이 지나 1258 년에 가서 칭기즈칸에게 멸망당했다. 그 자리에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레구’가 세운 일 칸국이 들어섰지만 통치체제는 압바스의 그것이었으니 주인만 바뀌었을 뿐이다.

소수의 몽골 지배층 역시 세금만 거두면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고 교역과 계산, 행정에 능한 이슬람을 대거 중용했다. 몽골 역시 유목민족이라 아름다운 여자와 사냥놀이만을 즐기며 살 뿐, 통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니 무함마드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 제국은 600 년, 즉 60 년 갑자 주기가 열 번 반복되었다는 판단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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