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조선을 대표한 자객--역사 속의 인물 제1회  _  2009.5.4
東風漸寒兮  동풍점한혜  壯士義熱  장사의열
忿慨一去兮  분개일거혜  必成目的  필성목적

동녘 바람 차지니 장사의 의기는 더욱 뜨겁구나,
분개를 떨쳐 한번 가니 반드시 뜻한 바를 이루리라

안중근 의사가 1909 년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기 하루 전 남긴 丈夫歌(장부가)란 시의 부분이다. (여기서 동풍이 차진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을 말한 것이다.)

교양이 풍부했던 안중근 의사가 지은 이 시는 원형이 있다. 중국 고대, 진시황을 암살하려다가 성사 직전에 아깝게 실패했던 자객 荊軻(형가)가 남긴 시가 그것이다. 보기로 한다.

風蕭蕭兮 풍소소혜  易水寒  역수한
壯士一去兮 장사일거혜  不復還  불복환

바람 소슬 부니 강물은 찬 데,
장사 한번 감이여 돌아오지 않으리니

이로서 안 의사는 옛날 역사 속 悲壯(비장)의 자객이었던 형가의 故事(고사)를 의식하고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형가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자객열전에 올라가있는 영웅이다. 그리고 형가는 ‘떠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으나 자신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성공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할 것을 다짐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1905 년 을사년에 이미 피보호국이 되어 주권을 상실했다. 신흥의 일본제국이 동양의 거인 청 제국을 물리치고 나아가서 유럽의 열강인 러시아까지 물리치고 얻은 것은 조선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일본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차례의 국운을 걸고 수행한 전쟁의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약소한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안 의사에게 있어 조선의 자주권을 그냥 넘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조선의 정식 군인으로서, 적군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던 것이다. 안 의사에게 있어 그것은 비겁한 암살이나 테러 행위가 아니라 정식 교전 행위였던 것이다.

안 의사가 남긴 또 다른 시에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위국헌신군인본분)’이라고 했음이니 분명 그 점을 안 의사는 자각하고 있었음이다.

그렇기에 형이 집행될 때에도 이는 잘못을 저질러 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은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는 戰死(전사)임을 일제 관리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군인으로서의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나라를 빼앗김에 있어 정정당당하게 군인으로서 싸우다가 힘이 부족함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 맥없이 주권을 앗기는 허약함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형가의 시를 본뜬 안 의사의 시가 말해주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즉, 자신의 거사가 훗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32 살의 꽃다운 나이였지만 한 목숨을 버리고 역사의 대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형가와 같이 역사 속의 ‘빛나는 별’이 되기로 마음먹었음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어떤 행동이 그저 일상 속의 것일 뿐, 역사의 행위가 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물론 스스로에게는 어떤 행동이 운명의 갈림길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역사의 갈림길이 됨을 인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앞서와 같이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행위가 역사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거사 전날의 시 속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행위와 역사적 행위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일상의 행위는 그저 한 개인과 그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역사적 행위는 수많은 사람과 그 후손에까지 영향력을 지니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강점으로 나라를 앗겼고 이어 독립한 것도 우리의 자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만일 그 때 안 의사가 그런 식으로라도 조선의 독립국임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약소하고 비겁한 민족의 후손으로서 고개마저 들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미래를 항해 잘 살아보겠다고 씩씩거리며 발전이니 민주니 외치고 다닐 수 있는 자신감은 분명 안 의사의 역사적 행위에서 일부 기인하고 있음이다.

고려 왕조 역시 죽음으로 충의를 지킨 정몽주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고려 왕조를 역사적으로 평가할 수 있듯이, 조선 역시 안 의사를 통해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불리하여 나라를 넘겨준다 해도 데 개 한 마리 짖어대지 않는다면 어찌 면목을 세울 수 있으리.

그런 면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을 대변하는 군인이요, 자객이었으며 忠犬(충견)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동양평화만세’를 외친 폭넓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먼 옛날 사마천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과 거세당하는 형벌인 궁형 중 양자택일을 강요받았을 때 치욕의 궁형을 택한 것에 대해 친구에게 자신의 입장을 편지로 밝혔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기 마련이나, 더러는 泰山(태산)보다 무겁고 더러는 鴻毛(홍모)-기러기의 깃털-보다 가벼울 때가 있으니 이는 그 따르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저 유명한 泰山鴻毛(태산홍모)의 고사이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거사야말로 조선 남아의 기개를 역사 속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됨을 의식했음이니 실로 태산보다 더 무거운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실로 장렬하고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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