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이슬에도 神(신)이 깃드나니  _  2009.7.17
‘고스트 스팟’이란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영가-영혼을 뜻하는 불교 용어-가 머무는 곳, 즉 고스트 스팟을 찾아가서 이승을 떠돌지 말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빌어주고 맺힌 恨(한)도 풀어주는 내용이었다.  

최근 보이지는 않지만 단골로 나오던 아주 어여쁜 女巫(여무)가 있었다. 겨우 스물을 넘겼을 까 싶은 갸름한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하고 한 밤중에 어두운 폐가나 텅 빈 공장 건물로 성큼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저 사람들은 우리 범인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줄이면 어느덧 그 아가씨 무당의 팬이 된 셈이다. 물론 어여쁜 까닭도 있겠지만, 내가 팬이 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평생 많은 책을 보고 말을 들었지만 그 아가씨의 한 마디 말처럼 나를 감동시킨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가들을 달래는 식을 올릴 때 곁에 있던 진행자가 뭐라고 묻자 그 아가씨 무당은 이렇게 말했다.

“있쟎아요, 내리는 이슬에도 신이 깃든다 하쟎아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이슬이란 불교에서 세상 만물의 덧없음, 즉 無常(무상)함을 표현할 때 쓰는 대표적인 비유이다. 金剛經(금강경)에 세상 보기를 꿈같이 보고 환처럼 여기고 포말처럼 보고 그림자처럼 實(실)이 없고 아침 이슬이나 순간 번득이는 번개처럼 보라는 유명한 詩句(시구)가 있다.

줄여서 夢幻泡影露電(몽환포영로전)이다. 세상과 사물 보기를 이 여섯 가지처럼 보게 되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금강경의 핵심 요결이다.

그런데 그 무상한 이슬, 해가 뜨면 어느 사이 증발해버리는 이슬, 가장 덧없는 여린 물방울에도 神(신)이 깃든다는 말은 진정으로 충격이었다.

신이 무엇인가? 神聖(신성)그 자체이다. 신성은 영원성과 실재성,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 일반적 지혜의 범주를 넘어서는 초월성이다. 그런 신성의 본질을 감히 정의한다면 ‘사랑’이다.

그런데 저 덧없는 이슬, 내렸다 증발하는 이슬에 신성이 깃든다면 이 세상은 온통 신성으로 가득함이 마땅하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실로 옳고 탁월하다. 한 세상 편히 거하다 갈 수 있는 실로 뛰어난 方便(방편)이다. 하지만 이슬에도 신이 깃든다는 말은 나로 하여금 이 세상 가장 미미한 것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나를 끔찍하게 아끼는 그 마음을 벗어던져야 자유를 얻는다고 일깨워주는 것이 금강경이고 그로서 삶에 대한 너무 큰 기대를 접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이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그러나 내리는 이슬에도 신이 깃드나니 네 주변의 미미한 이슬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이 행복할 수 있는 충분조건인 것이다.

유교의 경전 禮記(예기)의 첫 마디는 毋不敬(무불경), 세상과 사물을 공경의 자세로 대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삼가는 마음이 있으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이것이 예의 본질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이라는 가르침이다.

요즘 소통을 외치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먼저 보이지 않는 한 소통은 그저 ‘나 잘났으니 네가 받아라’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예를 갖추지 않고 소통하는 법은 세상에 없다.

일본 古事記(고사기)에 ‘이 세상에는 팔백만의 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팔이란 숫자를 가장 많은 수로 사용하는 바, 팔백만이란 더 없이 큰 숫자이고 그렇게 많은 신들이 세상에 거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잘난 서구 학자들은 애니미즘, 물활론이란 말로 간단하게 환원해버린다. 환원주의자들의 큰 오류이다.

미미한 아침 이슬에까지도 신이 깃든다는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세상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절로 무생물까지도 존중하도록 유도한다. 생명은 무생명이라고 부르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에 무생명이 파괴되면 생명도 파괴됨은 자연스런 결론이 아니겠는가!

신을 매장한 데서 출발한 서구 계몽사상이 가져온 가장 큰 해악은 이른바 물질만능주의를 불렀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나름의 합리주의라 하겠다.

오늘날 그 해악은 널리 알려지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말 자체가 이미 그런 회의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 ‘발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그 무엇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기가 오리라 본다.

그리고 내리는 이슬에 깃드는 신이란 말은 기독교와도 갈등이 없다. 세상 만물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니 그렇지 않은가. 누가 신을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萬神(만신)이냐 유일신이냐는 인간들의 재단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시기가 오면 ‘내리는 이슬에도 신이 깃든다’ 말하던 그 어여쁜 아가씨 무당의 말이 참다움으로 우리들 사이에서 울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간절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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