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공자)의 일생과 사상(1) -- 제자백가 이야기 제2회  _  2009.7.14
역시 공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으리라 싶다. 절대 지루하거나 골 때리는 일 없으니 읽어보시도록.

춘추 시대 수백개의 나라는 周(주)나라가 이전의 殷(은)나라를 멸하고 차지한 땅을 諸侯(제후)로 봉해진 혈연의 무리들과 공을 세운 異姓(이성)귀족들 에게 나누어주고 통치토록 한 것이다.  

이를 ‘봉건’제도라고 한다. 封邦建國(봉방건국)의 준말로서 영토를 封(봉), 주어서 나라를 세우게 하는 제도이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권력자가 넓은 땅을 직접 통치하기가 어려웠던 배경이 있다.  

공자는 이런 봉건제도가 파괴되기 시작한 춘추 말기에 태어났다.  

공자의 성은 孔(공)이고 이름은 丘(구). 구란 언덕이란 뜻인데 이름을 지은 까닭이 제법 재미있다.

당시에는 봄맞이 제사인 春社(춘사)가 끝나면 젊은 남녀들에게 실컷 마시고 춤추는 파티를 열어주고 밤이면 뽕나무 언덕에서 짝을 짓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다. 종족 보전과 번성을 위한 행사였다. 당시에는 연인들 사이에서 요즘 말로 ‘스와핑’도 빈번했다고 한다.    

공자는 바로 그 파티에서 생긴 아이였기에 ‘언덕’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 공자를 부를 때 ‘야, 언덕아 밥 먹을 시간이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아이의 부양은 모계 사회적 영향으로 아버지보다도 주로 어머니와 마을 공동체의 몫이었지만, 아버지를 일찍 사별한 터라 아무래도 공자는 초년에 제법 고생을 했던 것 같다.

論語(논어)에 ‘선비가 도에 뜻을 두면서도 험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이 여긴다면 더불어 말할 자격이 없다’고 실려 있는 걸 보면 실제 체험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그래서 나이 열 다섯에 학문의 길을 가기로 정하고 서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섰다고 얘기하고 있다. 당시 나이 열다섯이면 사실 成人(성인)으로서 독립하는 나이였기에 공자는 인생길로서 학문을 택했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중학교 시절 선생님은 ‘야, 공자님은 열 다섯 어린 나이에 벌써 학문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너희들은 맨날 만화책만 보고 있냐’고 꾸중을 하셨으니 완전 사기였다.

또 서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섰다고 말한 것 역시 당시의 사정을 좀 알아야 이해가 된다. 당시 사람의 수명은 대개 50 이면 저승길이었기에 서른은 중년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서른은 사회 초년병 애송이인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서른 들어 학문 연구가 어느 정도 자신을 내세울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니 요즘으로 하면 마흔 중반의 제법 인정을 받는 중견 학자라 보면 정확하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더 하면 공자가 나이 마흔에 헷갈리는 것이 없어졌다, 不惑(불혹)이라 했는데 이 말 또한 당시 사정을 감안해서 들어야 한다.

얘기했듯이 당시 인생 오십이었기에 마흔이면 이제 삶도 겨우 10 년밖에 남지 않았음이고 게임도 슬슬 마무리할 시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팔십년을 살 경우 나이 마흔은 헷갈리고 또 헷갈리는 인생길 딱 절반 지점인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나이 마흔에 다 접고 유학이나 전업,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기에 후반 역전을 도모하자는 생각이다.

나머지 부분도 약간 재미있게 해석을 해보자.

五十에 知天命(지천명), 六十에 耳順(이순), 七十에 從心所慾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라 한 공자의 말도 이런 내용이다.

대개 오십이면 죽는데 아니 웬걸 몸도 멀쩡하고 건강하며 의욕도 더욱 불타오르는 자신을 느낀 공자는 이거야말로 하늘이 나를 나은 이유가 있고 내게 주어진 미션, 즉 천명이 있음을 확신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육십이 되어 귀가 순해졌다는 말은 어떤 말을 들어도 모두 다 이해가 간다는 말, 찬밥 뜨신 밥 먹어보고 쓴맛 단맛 다 맛보았으며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백전노장이 되다보니 엄한 놈이 엉뚱한 소릴 해도 ‘짜슥- 뭐’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드디어 거의 남들이 살아보지 못하는 일흔까지 살다보니 이제는 뱃속 웅심이 다 사라지고 세상을 달관하게 되어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여봤자 남들 눈에 크게 허물될 일이 없더라는 것이다.

성현 중에 공자, 이 양반만큼 사실 억울한 이미지로 덧칠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워낙 오늘날 儒敎(유교)가 맛이 가다보니 그런 셈이다. 뭐든지 따르는 무리가 많아야 빛이 나는 법이다.

19 세기 말, 스스로 못 나서 서양 놈들에게 당한 것을 지식인이란 사람들은 괜히 엉뚱한 공자 핑계나 트집을 잡는 것이 마치 근대화의 첩경인양 떠들어대니 참으로 못났음이다.

공자의 언행을 담은 ‘논어’는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엮은 것이지만, 그 첫머리에 나오는 말, 그러니까 가장 서두에 나오는 말이 삶의 즐거움에 관한 얘기라는 것은 사뭇 중요하다.

“마음 통하는 친구가 멀리서 내가 보고파서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 하리오” 라 되어있다.

서두가 삶의 즐거움에 대한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논어인 것이다.

이런 양반을 두고 고리타분하다느니 격식과 인습에 얽매인 권위주의 운운 하며 매도하는 것은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것과 진배 없다.

다음 글에선 공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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