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일 디 자이트(Die Zeit)지의 공동 에디터인 조셉 조페라는 양반이 미국의 힘은 여전히 절대적이라는 내용의 글을 권위 있는 저널 ‘포린 어페어즈’ 지에 기고했다. (국내 모 일간지에서도 잠깐 보도한 바 있다.)
내용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제목이 더 그렇다.
Default Power!
컴퓨터 좀 만져봤다면 ‘디폴트 값’이 무슨 말인지 안다. 프로그램에서 별도 지정이 없으면 알아서 깔아주는 값(value)이라는 의미. 따라서 오늘날 미국이 기본 값을 깔아주지 않으면 이 세계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최근 미국 경제가 저 모양이 되면서 또 다시 미국의 맛이 갔네, 미국은 이제 슬슬 가고 있어 등등 이런 내용의 글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다.
허기야 뭐 세상이 다 그렇지 않은가!
좀 아니다 싶으면 아닌 쪽의 글이 우후죽순처럼 매체에 뜨고 역시 그렇다 싶으면 다시 그런 쪽의 글이 러시를 이루는 것은 정치나 경제 등등 모든 분야가 그렇다.
그러니 이번 기사 ‘디폴트 파워’는 최근 코너에 몰린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주장들에 대해 나름 일침을 가한 셈이라 하겠다.
제목도 잘 하면 유행어가 될 것도 같고. (그런 거 보면 개그 콘서트나 고답적인 국제정치학이나 별 차이가 없긴 하다.)
이런 기사가 오른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아, 미국 친구들이 그간 좀 위축되었나 보지, 미국의 기를 살리는 글이 오른 것을 보면. 연이어 포린 어페어즈에 오늘 또 다시 ‘달러의 딜렘마’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기에 이건 달러가 어렵다는 내용인가 싶어 읽어보니 그게 아니고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오늘날 어느 통화도 당장은 달러를 대체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제목은 ‘트릭’이고 역시 미국 친구들 기 살리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힘은 디폴트 값이고 달러도 여전히 디폴트 값이라는 얘기이니 미국 아직 전혀 문제될 거 없어 계속 이대로 쭈욱 가는 거야 하는 격려와 고무의 글들이다. (어지간히 쫄았나 보다.)
기억나는 일로, 지난 3월에는 미국의 맛이 갔네, 안 갔네를 놓고 글들이 워낙 많다보니 독자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이 방면의 글들 중에서 제법 영향을 많이 끼친 그간의 글들과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안내 기사가 ‘포린 어페어즈’에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이 문제에 대해 ‘주절대려면 이 정도는 읽고 나서 입을 열어라’ 식의 가이드였다. 친절한 포린 어페어즈씨!)
그런데 이번 디폴트 파워란 제목의 기사가 오른 것을 보니 약간 풀어주는척 하다가 이번 글로 한방에 브레이크를 걸자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앞으로 미국 안 된다는 식의 책이나 글은 그만 써라, 돈 안 될 것이다, 알겠냐 응! 하는 식 말이다.
사실 미국 맛이 갔네 안 갔네의 논쟁을 촉발시키고 나름 규모 있는 시장으로 만든 사람, 즉 이 시장의 원조는 폴 케네디란 사람이다. (죽은 케네디 대통령 말고.)
그는 1987 년 무렵, 월남전 패망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미국과 외관상 강하게 보였던 소련을 비교하면서 장차 미국도 시들 것이라는 주제로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기폭제가 되었다.
제목도 멋있게 ‘강대국의 흥망’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엄청 팔렸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제목은 역사가 기번이 쓴 ‘로마제국의 쇠망’을 본떠 만들었기에, 미국이 로마 제국이라는 연상작용과 함께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재미난 사실은 그 이후 3 년도 못 가서 소련이 일시에 붕괴해버리자, 폴 케네디도 강연이나 글 기고 등의 수입이 대폭 줄어들면서 사실상 은퇴하게 되고 그 뒤로는 미국은 ‘이제 앞으로 진짜 잘 나갈 거야’ 식의 책이나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에 브레진스키란 양반이 거대한 체스판 등등 좋은 제목의 책을 썼지만 케네디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이후 글발 좀 있는 국제정치학자들은 너도 나도 뛰어드니 나름 재미도 있고 돈도 좀 되는 ‘지식 시장’이 되었다.
그러던 중 ‘소프트 파워’를 유행시킨 ‘조셉 나이’란 양반이 돈 좀 벌었다는 소식도 있었고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는 ‘문명의 충돌’이란 선정적인 타이틀로 재미를 본 ‘헌팅턴’이란 작자도 있었다.
역시 책은 제목을 잘 뽑아야 하고, 시장은 스타가 등장해야 규모가 커진다. 디폴트 파워란 그럴듯한 제목을 뽑은 조셉 조페도 포린 어페어즈가 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디폴트 파워는 조셉 나이의 소프트 파워나 스마트 파워의 짝퉁이라 뜰까 싶긴 하다.)
어떤 방면이든 컨설팅 시장이나 담론 시장은 누가 그럴듯하고 멋진 제목을 뽑아내느냐 게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정리하면 미국의 향배를 놓고 펼치는 이러쿵 저러쿵 식 담론 시장과 실제 앞으로 미국이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느냐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라는 생각이다. (음양오행으로 세상을 보는 내가 이런 글들을 읽는 것은 약간 ‘컨닝’한다는 차원도 있고, 학자님들이 어떻게 놀고 있는가를 지켜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아울러 그보다는 음양오행이란 도구가 백 번 우월하다는 것이 내 입장이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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