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을 혹시 아실런지요?  _  2009.8.13
꽃잎 하나 날려도 그만큼의 봄이 줄어들건만
표표한 바람에 온통 날려가니 그저 시름하는데...

말복 무더위 속에서 문득 입에서 맴돌아 나온 구절이다. 두보의 구절이 분명한 데, 제목을 몰라 찾아보니 曲江(곡강), 굽이 흐르는 강이다.

구절의 원문은 이렇다.

一片花飛感却春  風飄萬點正愁人
일편화비감각춘  풍표만점정수인

얼마나 감상적이고 여린 감정인가! 詩聖(시성)두보는 정말로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나 보다. 시인의 섬세한 눈에는 떨어지는 꽃잎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데, 이는 바람에 우수수 져버리는 꽃잎들은 無情(무정)타 하리 아니면 無心(무심)타 하리. (이 대목에서 지난 봄 쌍계사 벚꽃이 무리지어 바람에 날아오르던 풍경이 떠오른다.) 

‘풍경에 느낀 바가 있어 마음을 다치게 됨’을 感傷(감상)이라 한다. 풍경에 마음을 다칠 수 있는 것은 풍경에 우리의 마음을 依託(의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적 이입은 서양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顯著(현저)하다. 물론   그 까닭도 있을 것이니 이유인 즉 이렇다.

동아시아 문화 풍토 안에서 사람들은 자연과 나를 구분해서 보지 않았다. 구분하려는 마음보다도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 우선이었다. 物我(물아)를 하나로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는 꽃잎에서 그리고 이는 바람에 대해 有心(유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를 하나로서 느낄 때만이 꽃잎과 바람에 내 마음을 의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하는 구절을 얻을 수 있었다 하리라.

그러나 서양에도 그런 생각의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위  비주류로 남아야 했다. 소수이긴 했어도 드물게 찬연한 빛을 뿌리기도 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 노래한 워즈워드가 바로 그랬고, ‘이니스프리의 호도’를 노래한 예이츠도 그런 사람이었다.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사물과 내가 하나임을 느끼는 정서는 정통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범신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서구는 神(신)으로부터 뛰쳐나와 ‘개인’을 발견했고 개인의 자유를 노래했다. 소위 近代(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굴레에서 벗어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드디어 極限(극한)의 경지까지 사고를 밀고 나갔다, 合理(합리)라는 명분 하나 들고 씩씩하게도.

멈출 이유가 없다면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합리성이다. 그 결과 예기치 않았던 극단적인 비극들이 생겨났다. 두 차례의 극단적인 전쟁은 극단적인 희생을 가져왔던 것이다.

게다가 개인으로서 나는 너무도 외롭다는 고독병까지 앓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안전망 운운 하면서 합리적 제도를 만들고자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안전망이 있다 해도, 모두가 남이고 심지어는 나마저도 남인 것 같은 힘든 병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그 반성으로 서구인들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실수를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합리적 사유 속에서는 멈출 이유가 없다 해도 무단히 멈추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이유는 없음에도 멈추어야 하는 그 ‘이유’는 무얼까?’

바로 이것이 지금 서구인들이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문제라고 나는 여긴다.

그러니 만에 하나, 서구인들이 나에게 힌트를 얻고자 물어오는 일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꽃잎 하나 날려도 그만큼의 봄이 줄어들건만, 표표한 바람에 온통 날려가니 그저 시름하는데...’라는 동양의 두보라는 시인이 남긴 구절이 있는데 혹시 그 마음을 알 수 있겠는지요?  

그 결과 그것은 ‘센티멘탈리즘’이 아니냐고 답해온다면, 나는 ‘아니오, 틀렸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해주겠다, 약간은 뽐을 내면서.  

꽃잎도 당신, 부는 바람도 당신, 내 앞에 서 있는 당신도 당신, 그리고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도 당신이라고 말이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