詞(사)란 무엇인가?, 길고 면면히 이어져오는 문화의 장강대하!  _  2009.5.28
사에 대해 약간의 내용을 소개할 까 한다. 누군가 宋詞(송사)는 너무 어렵다고 하기에 한자 때문에 그렇지 실은 대단히 쉽고 대중적인 것이라고 답했다. 마침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를 宋詞(송사)라고 하여 당나라 때의 시가인 唐詩(당시), 원나라 때의 희곡인 元曲(원곡)과 함께 중국 고전문학을 대표하는 양식이다.  

흔히 詩(시)라고 하면 눈으로 읽거나 낭독하는 글이라 여기기 쉬운데, 이는 현대시가 그렇기 때문이고 시는 원래 곡에다가 가사를 붙인 것이다.

송나라 때(AD 960-1279) 크게 유행한 詞(사)는 오늘날의 유행가와 거의 같은 것으로서 실로 대중 노랫말이고 대중 문학이었다. 그리고 그 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제 내린 비’라는 노래, 옛날의 인기가수 윤형주 씨가 불렀다.

이 노래는 바로 그 詞(사)라고 해도 좋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비가 내렸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로 이어져가는 감상적이고 감미로운 노래. 1973 년 크게 유행했기에 소위 70-80 정서를 대변하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들어보시면 곡도 그렇고 노랫말도 지금 젊은이들이 충분히 즐기고 따라 부르고 싶은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랫말에 담긴 情調(정조)는 고스란히 무려 천 년 전의 송사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가사도 거의 같은 유형이다.

먼저 ‘어제 내린 비’라는 제목부터 그렇다.

우리들은 ‘비’라는 한 음절의 어휘에서도 엄청나게 풍부하고 다양한 정서와 감정을 가진다.

그 감정의 색과 맛은 개개인의 지난 시절 경험의 세계에 문화의 풍부한 유산들이 함께 곁들어지면서 생겨난다.

그렇기에 영국인이 비에 대해 느끼는 느낌과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유산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시인, 철학자, 예술가, 문인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과 작품을 통해 후대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변주를 자아내고 또 때로는 파격적인 참신성도 더해진다.

그러면 한 개인이 그들의 특정 작품을 대하지 않았어도 주변 사람을 통해 마치 공기와도 같이 그 정조는 스며들게 된다. 우리를 둘러싼 것 중에는 기체만이 아니라 문화적 대기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앙드레 모로아는 그래서 자신의 소설 제목을 ‘대기’라고 멋지게 표현했다. 불어로는 climats, 영어로 climate라고 했으니 우리 말 번역으로는 사랑의 풍토라고 되어있다.

그러니 비라고만 해도 벌써 우리에게는 내부로부터 솟구치는 그 무엇이 있는데, 더하여 어제 내린 비라니 더더욱 그렇다.

왜 그제 내린 비는 없고 오늘 내리는 비보다 어제 내린 비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까?

어제 내린 비는 지난 시간의 비이니 그 비를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되고 이는 바로 回想(회상)이다. 회상은 추억으로 이어지고 추억 속에는 아련한 정서가 모든 이에게 깃들어져 있을 것이니 어제 내린 비가 제 격인 것이다.

이 어제 내린 비는 어느 날 문득 생겨난 문구가 아니라, 우리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시인들이 발견하고 작품 속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해왔던 문구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중가요였던 宋詞(송사)였음이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하는 가사도 그렇다.

빗물은 그 자체로서 사랑의 물이다. 그 역시 ‘하늘은 봄에 비를 뿌려 초목을 가꾸어내지만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고전 문구와 맥이 닿아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인 것이니 빗물은 사랑의 징표인 것이다.

그 생각과 정조는 ‘송사’ 속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그러니 사랑의 빗물, 즉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의 마음을 우산 하나로 어떻게 가릴 수 있겠냐고 애절하고도 간절하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호소하고 있다.

어제 내린 비 못하지 않게 우리를 움직여놓는 것으로 ‘간밤에 내린 비’가 있다. 昨夜雨(작야우)가 되는데, 이런 노랫말은 송사에 널렸다.

간밤 비는 지나간 시간이고 또 어두운 밤이어서 더욱 우리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돌리게 한다. 혼자 골몰하기 쉬운 시간대이며, 거기에 창밖에 비마저 내리면 그 간절함은 도를 더할 것이다.  

‘간밤의 비’는 우리 시조와 가사 속에도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 송대에 퍼진 대중적 감상적 정조는 중국과 우리 그리고 일본, 베트남 등지로 퍼져나가 그들 나라에서 다시 다양한 문학 양식 속에 흡수되고 침투되어 또 다른 문화적 유산들을 만들어내었다.

내가 좋아하는 홍콩 노래, 영웅본색 시리즈 중에 주 타이틀로 소개된 노래가 있는데 작고한 매염방이 불렀다.

‘간밤 내린 비가 깊이 잠든 내 꿈을 깨웠네’ 하는 노랫말이다. 그런데 이 가사는 송사에 나오는 가사의 변형이다. 그런데 그 원형 가사는 윤형주 씨의 노래 속 ‘조그만 길가 꽃잎이 우산 없이 비를 맞더니 지난 번 깊은 꿈속에 활짝 피었네’로 변주되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사실 윤형주 씨의 노랫말은 송사의 가사와 어휘들을 다시금 이리저리 재배치한 것일 수도 있다. 가사들을 보고 고르고 변형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가사를 짓다보니 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두고 표절이라든가 모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약간의 변형을 통해 다시 한 번 시대를 거쳐 이어져온 사랑의  정조를 아름다운 곡에 붙여 들려주고 있음이다.  

물론 최근에 와서 우리 고유의 정서가 아니라 서양식 정서도 많이 들어오고 있고 최근 댄스곡의 노랫말 속에 반영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원한다면 나를 가져봐, take me if you want, 식의 노랫말인데 이 또한 서구식 정서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는 ‘나 잡아봐라’ 식, 초원에서 두 연인이 달려가면서 ‘잡아보셔요’ 하는 게임에 몰두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벌과 나비가 꽃을 찾는 몽룡과 춘향의 정조인 것이다.

그러니 윤형주 씨의 ‘어제 내린 비’를 어렵다 하지 않듯이 송사를 어렵다고 하는 것은 좀 그런 것이다.

참고로 ‘비’에 대한 문화적 원형의 출발은 무산의 구름과 비가 아닐까 한다.  巫山雲雨(무산운우), 저를 다시 보고 싶으시면 무산에 오시면 되어요, 아침에는 구름으로 저녁에는 비로 내릴 것이오니 하는 무산의 神女(신녀)의 꿈속 언약 말이다.

우리 유행가 노랫말의 문화적 연원을 거슬러가는 일은 학자들의 영역이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토록 애호하는 여러 대중가요들과 최근 발라드 노래까지도 실은 그 맥이 천 년을 거슬러 오르는 길고 긴 長江大河(장강대하)의 흐름 속에 있다는 얘기이다.

송사에 대해 한 가지 더 재미난 점을 얘기하려 한다.

송사를 모은 책을 사보면 제목이 이상하다. 우림령, 보살만, 완계사 등으로 세 글자 제목인 데 이것이 여기저기 같은 제목으로 다른 가사들이 붙어있다. 이 제목은 연주곡의 명칭이지 노래의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완계사’ 하면 그에 따른 곡이 정해져있다. 그 곡에 맞추어 시인이 노랫말을 지어 부르는 식인 것이다. 그러니 같은 제목에 무수한 노랫말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어제 내린 비’ 곡에 다른 가사를 바꿔 붙여 부르는 식이다.

그러면 다 지어진 곡에만 가사를 붙이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이 중국 1800 년도 강희 연간에는 무려 826 가지 곡이 있었을 정도이니 가사만 잘 지어도 충분하다 하겠다.

조만간 코너를 하나 따로 만들 참이다, 좋은 시와 글들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거기서 아주 감상적이고 풍부한 정조로 가득한 송사들을 소개드릴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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