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_  2009.5.28
참 얘기하기가 만만치 않은 주제이지요. 百人百色의 세상에서 자칫 오해를 사기 쉬운 것이니 말입니다.

제목을 종교라 하지 않고 신앙이라 하지도 않고 믿음이라 한 것은 어떤 종교든 간에 우선적으로 믿음이 바탕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투철한 깨우침을 앞세우는 불교마저도 결국 ‘믿는 마음’이 없이는 空虛(공허)하다는 생각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는 그것에 기대고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불교에서 歸依(귀의)라는 말을 씁니다. 돌아가 기댄다는 뜻입니다. 좀 더 풀어 말하면, 힘 좋을 때는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지치고 힘들면 돌아가 기대거나 안길 곳을 찾는 마음은 자연스런 것이고 그 자연스런 마음이 믿음이고 신앙이라 여깁니다.

젊어 큰 뜻을 품고 대처로 나아가 웅지를 펼치다가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하면 우리는 누구나 떠나온 곳을 그리게 됩니다. 그래, 그 때가 더 좋았어, 돌아가면 여전히 나를 반겨줄 거야 하면서 사람은 돌아갈 곳을 찾습니다.

믿음은 그렇기에 우리 삶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이지요.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이지요. 우리가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의 가장 고통스런 진실은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여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때일 것입니다.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그러니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 것이지요.

다양한 문화상의 모든 통과의례는 그 점을 확실하게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너도 컸으니 네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두렵고도 힘겨운 진실에 대한 가르침 말입니다.

오래 전 곰의 세계를 다룬 다큐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미 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하는 어린 곰이 등장합니다. 모든 관객이 걱정하고 우려합니다.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큐의 초점은 어린 곰에게 맞춰져 있기에 어린 곰이 개울에서 서툰 솜씨로 물고기 잡이에 번번이 허탕치는 장면에서 모두들 탄식합니다.

저도 몰입해서 그 영화를 보았고 함께 걱정했고 해피엔딩에서 함께 웃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는 환한 표정으로 극장을 나섰지만 제 마음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온 어두운 그림자가 그 환한 표정들 위로 슬며시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한 곰은 그리하여 ‘록키’ 산맥에서 잘 살아가겠지, 하지만 곰의 뛰어난 사냥 솜씨로 하여 잡혀 먹혀야 하는 연어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카메라의 초점을 그 연어에 맞춘다면 그 영화는 공포 호러 영화가 되거나 연어의 고통스런 삶을 주제로 하는 영화가 되겠지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고기의 죽음보다 곰의 죽음을 더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곰은 우리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포유류인 곰의 표정에서 우리들은 금방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또 전달할 수도 있지만 물고기는 눈도 작고 표정의 변화를 읽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잘 없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은 곰이든 물고기든 생명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생명인 이상 그 죽음이 갖는 비중은 같을 수밖에 없지만,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물고기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덜 무겁게 할 뿐이지요.

가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면 개그맨과 아나운서들이 바다로 나가 금방 잡아 올린 물고기, 마구 발버둥치는 물고기를 야 이놈 봐라, 힘차네 하면서 선상에서 사정없이 회를 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장면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되는데 저에게는 정말 죄송스런 얘기지만 엽기 호러물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양한 입맛을 즐기시는 분들에게 말입니다.

돌아와서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고 선량한 마음이 있지만 그것들도 실은 우리가 얼마나 느끼고 있고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아는 만큼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때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도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알면 다치는 일도 많기에 그렇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가족들과 오붓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길거리 한편에서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 세상에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대충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보로 가득차있는 시대라 말입니다.

사람만이 귀한 것이 아니라 풀 한포기에 이르는 모든 생명이 귀하다는 생각에 이르고 나면 이 지구는 온통 고통이 만연하니 일요일 오후의 가족 나들이가 어떻게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의 양심이 실로 알량하다는 생각에 이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실로 자학일 뿐입니다.

그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고 하겠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일종의 勇氣(용기)입니다. 두려운 진실 앞에서 눈을 뜰 수 있는 마음이니 용기인 것이지요. 통과의례는 그 용기를 가지라고 우리에게 다그치는 의식인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이 고통만큼이나 삶의 기쁨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智慧(지혜)입니다.  

봄날 꽃이 피고 새가 지져귀는 그 따스한 바람 속에서 우리가 삶의 기쁨을 어찌 아니 누리겠습니까? 우리는 살다가 만나게 되는 좋은 ‘한때’가 있으니 그 때는 맘껏 누리셔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과 나의 권리인 것이기에 말입니다.

요 며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리들 마음이 무겁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 사진, 소파 위에서 잠시 단잠을 자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손자와 함께 자전거를 몰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바로 그 ‘한때’였던 것이지요.

더러 어떤 분들은 제 블로그에 오셔서 저를 다소 힐난하는 말씀들을 남기셨습니다. 그 분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고 따르던 분이 가셨는데, 당신은 어쩌면 그토록 냉정한 모습이냐고 많이 섭했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분에 대한 제 개인의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 저 역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다만 좀 살은 사람으로서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제 방식이 약간 다르다는 점만 이해해 주셨으면 더 없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다시 한 번 얘기지만 제게는 미움이 없습니다. 이는 제가 도를 닦아서 도인의 경지에 들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상 가득한 생명의 고통을 곁눈질-바로 보기에는 너무 힘들어서-하며 그 아픔을 견디기도 힘든데, 또 누구를 미워하며 살겠습니까?

제 블로그에 오셔서 저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실은 아픔을 그런 방식으로 남기신 그 분에게 진심으로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기만을 기원할 뿐입니다.

제 블로그를 ‘희희락락호호당’이라 했지만, 그것에는 세상의 모든 悲哀(비애)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씩씩한 마음을 스스로 다잡기 위함이기도 한 것을 이 자리를 얻어 밝힙니다.

다시 본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 고통과 번뇌가 다함이 없을지언정 그에 못하지 않게 더 힘을 만들고 키워서 부단한 고통과 슬픔 앞에서 부단히 쓰다듬어주고 함께 자리하며, 그를 통해 그 ‘한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굳은 마음, 즉 意志(의지)일 것입니다.

그 의지는 고통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저 고통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정신적 힘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면 이 고통으로 가득하고 그 못하지 않게 삶의 기쁨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엄청난 권능을 당신에게 주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저는 그 답을 이 글을 읽는 각자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우리의 지혜와 지식, 이치를 따지는 능력이 그다지 변변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합리적이다, 이 말은 이치에 맞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다 들어맞는 법 또한 없다는 것을 우리 앞을 살다간 무수한 유명무명의 先師(선사)들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말씀을 남기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없음, 즉 NOTHING 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냥 ‘없다 있다’ 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존재를 따질 이성적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이런 말씀을 하신 분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성과 의식의 ‘저편’에 있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져 봐도 하나님은 그 경계 저편에 있다는 말은 우리의 이성과 인식기능이 대단히 제한적이고 제약이 있다는 뜻입니다.

좀 어려운 말들이지요.

그러나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씀들을 모르셔도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믿음, 부처님과 여러 보살들에 대한 믿음이란 그런 어려운 말씀들을 모르셔도 관계없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저 단순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그 무엇을 부정하기에는 너무나도 간절하다. 쉽게 말해 평상시에 큰 소리 치다가도 신체 어느 부위에 이상한 것이 있어 조직검사만 해도 우리는 벌써 믿고 의지할 대상을 찾지 않습니까?

그러니 믿고 의지할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 머리로서 이치로서 믿고 의지할 대상을 찾다보니 온통 모순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쟁하면서 양측이 모두 하나님을 찾는 것이 현실일진대 과연 하나님은 어느 편을 드실까 생각하면 머리가 빠개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약성서에 가득한 그 수많은 모순들도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우리 ‘이성과 의식의 저편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무겁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리하지요.

세상이 고통과 기쁨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지혜도 중요하고 그 고통들과 부단히 함께 하며 쓰다듬어주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 부단한 과정에서 우리가 다치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편에 있는 감히 이름으로 한정지어 부르기도 어려운 무엇에 대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가시든 성당에 가시든 대웅전 방석에 앉으시든 관계가 없습니다. 또 그냥 당신 마음속에 계신 부모님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은 어떤 믿음이든 좋습니다.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라면 말입니다.  

다행히도 조상님도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듯, 기독교에도 예수님과 마리아님이 계시고 불교에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이 계십니다.

모두 당신을 친근하게 받아주시기 위함입니다.

당신이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른이라고요?

그런데 어른이란 믿고 의지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은 한 번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당신의 속에 그리고 제 속에는 여전히 믿고 의지할 엄마와 아버지를 찾고 있는 아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여러 조상님들, 저를 살펴주시고,
주 예수 하나님, 제가 믿사오며,
관세음보살, 문수보살님, 저에게 가피를 내리소서.
여러 선현과 대덕님들, 제가 믿고 의지하나이다.

그리고 멀리도 아니고 제 신변 바로 곁에서 여러 神聖(신성)이 임함을 보고 느끼게 해주심에 감사의 기도 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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