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白露(백로), 희게 빛나는 이슬의 때란 의미.
아침녘 동네 뒷산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이슬이 바지 밑단을 흠뻑 적셔올 것이다.
백로부터 벼이삭이 본격 영글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때가 되면 농부의 마음에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수확하겠구나 하는 설렘과 이른 봄부터 여름까지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가득하다.
정작 추수하는 기분보다도 어쩌면 이때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국운 상 백로절은 언제였을까?
1999 己卯(기묘)년이었다.
1997 년 말 외환위기 파동의 아픔을 겪었지만, 우리가 금방 그 어려움으로부터 딛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가 백로였기 때문이다.
따지면 외환위기는 8월 20 일경의 처서 무렵에 내린 지형성 집중 강우였다. 이에 철 늦게 파종한 곡식들이 쓰러졌으나 제 때에 심었던 농사는 탈이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심었다는 것은 국운의 파종기인 1976년을 전후해서 심은 작물이었다. 1975 년 자동차, 1973 년 조선, 1978 년 플랜트 건설, 1982 년 전자가 결국 우리를 먹여살리게 되었다.
이처럼 농사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자식 농사도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부러워서 뒤늦게 뛰어든 기업들은 외환위기로서 모조리 쓸려가고 말았다. 한보를 필두로 진로와 해태, 쌍방울, 쌍용 등이 그 예라 하겠다.
그러니 제 때에 심은 작물은 늦여름 강우에도 쓰러지지 않았고 1999 년 백로를 맞이하여 따가운 가을 햇볕 속에서 알차게 영글어갔던 것이다.
그 주력산업과 기업들이 엄청난 성장을 통해 결실을 거두면서 외화를 들여왔고 그 바탕 위에서 석유와 온갖 수입을 통해 우리는 부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그 때 우리는 북쪽의 우리 겨레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이었다. 결국 농사를 잘 지었기에 마음도 넉넉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1976 년의 파종기에 제대로 뿌린 작물이 없었기에 국운의 입추 무렵인 1994 년이 지나자 무려 수백만이 기아로 목숨을 앗겨야 했으니 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일러준다.
그 이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은 김정일은 수백만을 굶어 죽인 끔찍한 失政(실정)을 외면하고 그저 이어간다는 일념 하나로 김대중 대통령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을 그저 역이용했을 뿐이었다.
햇빛 정책, 바람직한 정책이었지만 孤掌難鳴(고장난명)이라는 말처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잠시 지면을 빌려 말하면 북한은 2012 년, 앞으로 3 년 이내에 붕괴하도록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 신기한 점은 북한 스스로도 그 점을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주장해오던 강성대국이란 결국 핵 보유를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그래서 북한은 2012 년까지 핵보유 인정으로 강성대국을 이룩하고 나아가서 경제 호랑이(economic tiger)가 될 것을 호언하고 있다.
이 말은 거꾸로 해석하면 정확하다. 2012년이면 북한은 강성 대국이 되지 못하고 경제 고양이도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돌아와 얘기하면 국운의 백로였던 1999 년은 우리 내부도 양극화라는 현상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가을 추수를 앞둔 시점에서 누구는 풍성한 수확이 예정되었던 반면, 누구는 가을 농사를 이미 망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듯, 국민들도 양쪽으로 갈려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과 위화감은 국운의 秋分(추분)이자 秋收(추수)가 본격화된 2002 년에 가서 노골화되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가지긴 했어도 더 가지려는 자,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 가질 것 같은 희망이 없는 자들이 뒤섞여 국론은 분열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되풀이되는 교훈을 눈으로 보는 현장이었다.
고난은 같이 해도 부를 같이 하긴 어렵다는 말, 이루기보다 이어가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과연 헛말이 아니었음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가짐’에 있어 ‘공정함’을 세우겠다는 약속으로 대통령에 오른 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저마다의 거친 주장과 요구에 밀려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었으니 그 한과 분을 안은 채 세상을 버렸다. 개탄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 분의 바람과 이상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가진 자를 가지지 않은 자가 시기하는 법이 없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따듯하게 돌보는 세상’이 올 것이라 믿는다.
물론 그 시기도 알려주고 가셨다. 2009 년에 가셨으니 그 꿈은 60 년이 지난 2069 년에 가서 그저 당연하고도 평범한 일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념 갈등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정조 이래 쇠락 일변도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힘이 없는 관계로 나라를 앗겨야 했고, 다시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남과 북은 나뉘었고, 대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단 일구고 일어서야 함을 강조하면서 혹독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민주화를 달성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겨레가 富(부)를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2002 년 무렵이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수 백 년 만에 처음 경험하게 된 초유의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기 보다는 저마다의 주장이 거칠어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순박하고 참기만 하던 우리 겨레가 일단 財富(재부)를 확인하자 잠시 흥분했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마치 서로를 같이 하지 못할 원수처럼 대하니 시간이 조금 지나 흥분이 가라앉으면 서로 간에 얼마나 민망하고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국운의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게 될 것이다. 주장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예의는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원래 우리 겨레는 덕성과 예의를 구비한 민족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본다.
2009 금년은 겨울의 초입이다. 하지만 2012 년이면 피차간에 반성의 싹이 터올 것이니 겨울은 이 블로그에서 늘 말하듯 나쁜 계절만은 아닌 것이다.
조금 무거운 얘기였다. 그리고 어쨌든 백로로부터 또 한 해의 결실이 영글고 있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하늘은 더 없이 푸르다. 이 푸름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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