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사진을 화투장의 홍단처럼 바꾸고 오픈 다이어리에 올린 물 그림을 보다보니 흥취가 제법 인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
나는 사진 찍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을 무척 즐긴다. 즐기다보니 익숙하고 능한 편이다.
즐기고 익숙하고 능하다고 했지만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를 일이다. 재능이 있다 보니 잘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즐기는 것인지, 즐거움이 먼저여서 자주 대하다보니 능하게 된 것인지 그 순서는 모를 일인 것이다.
그림 그리기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다. 유치원 시절, 동네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나있었으니 분명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에게는 두 대의 명품 카메라가 있었다. 콘탁스 III 모델과 롤라이코드라고 하는 고가의 명품이었다. 둘 다 전설 속의 카메라들이다.
평양에서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무일푼이었지만 1960 년대 당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셨던 아버지는 카메라 대금으로 당시 부산 국제시장 상가 일곱 개의 돈을 지불하셨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남도 아닌 아들이었으니 얼마나 마음 놓고 자랑하셨을까!
아버지는 주로 휴대하기 편한 콘탁스를 들고 여기저기 촬영을 다니셨고, 집에는 임시 암실을 만들어놓고 현상과 인화를 하시면서 즐기셨다. 그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촬영과 현상, 인화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인화지 위에 없던 그림이 새겨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지곤 했다. 당시의 약물 냄새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지울 수 없는 향수로 남아있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내 경우 그림은 타고난 재능이 우선이었다는 것이고 사진은 환경적 요소가 먼저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대학 입학과 함께 집안이 망했고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다. 대학 다닐 형편이 아니었지만 졸업까지 했다는 것은 그나마 그럴 운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기분파이고 억척스럽지 않은 점은 어릴 적 부잣집 외아들의 영향일 것이고, 그러면서도 강한 정신력을 지닌 것은 고된 세월이 가져다 준 단련의 힘일 것이다.
직장에 들어가게 되어 수입이 생기자 제일 먼저 산 것이 카메라였다. 니콘 FM-2, 정말 좋은 놈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일한 재산이자 유품인 명품 카메라들은 사실 조작이 불편했다. 그것들은 레인지 파인더 방식-이런 말을 이제는 알까?-이었기에 SLR 방식의 카메라인 니콘이 더 편리했다.
또 그림종이와 물감들도 편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림 열나게 그리다가 다시 열나게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다. 이런 식으로 즐긴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런데 뭐든지 그렇지만 카메라를 즐기다 보면 장비가 자꾸 늘어나게끔 되어있다. 교환 렌즈들을 사들이게 되고, 쓸 데 없이 필터도 이것저것 집적대고 삼각대도 좀 더 고가의 것을 사게 되고, 필름도 네가에서 포지 필름을 사용하게 되고, 많이 찍다보니 현상인화비도 제법 부담이 되고, 이런 식으로 취미생활은 돈이 드는 법이다.
사진을 많이 찍다보면 노출에 대한 감각은 세련되어지기 마련이다. 비오는 날 밤에도 찍고 흐린 날에도 찍고, 달밤에도 찍고 이런 식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사진을 찍다보면 노출을 얼마로 주어야 할지는 자연 몸에 배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적 지식은 늘어가도 정작 좋은 사진은 갈수록 찍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下手(하수)들이 택하는 착각이 있다. 장비가 좋으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다. 그래서 더 많은 렌즈를 구입하게 되고 더 비싼 렌즈를 구입하게 된다. 때로는 더 비싼 카메라를 사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좋은 사진을 찍는 수련에 있어 최악의 방법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당신도 하다보면 알게 된다. 좋은 사진은 장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주어진 장비가 제한되고 제약될수록 사람의 예술적 창의성은 고도로 발휘될 수 있다. 예술적 창의는 정신의 영역이고 장비는 장비일 뿐이고 물질의 영역인 것이다. 물질로 정신의 영역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지금부터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본 마디가 시작된다.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장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기술적 숙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눈이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피사체를 대하는 작가의 눈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마주하는 피사체는 3차원의 입체이고, 그것을 찍은 사진은 2차원의 그림이다.
3차원 감각에서 아름다운 광경일지라도 2차원 평면으로 변환시키면 대단히 흥취가 없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진을 찍는 작가는 3차원의 사물을 2차원으로 변환시켰을 때 어떤 그림이 되는 가를 경험을 통해 미리 예측해낼 수 있어야 사진 찍는 눈을 가진 것이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있다.
사진은 어디까지나 프레임, 즉 네모난 틀 속으로 그림을 집어넣은 것이라는 점이다.
소나무가 바람결에 나부끼고 저 편에 맑은 물이 흘러가고 먼 산의 바위가 우람하게 자리한 절경이 있다고 하자.
작가는 둘러보면서 그 아름다운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지만, 정작 문제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 작가가 아름답다고 느낀 그 피사체들을 한꺼번에 집어넣었을 때 과연 흥취가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분명 그 하나하나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모두가 들어간 프레임 속에서 그것들은 섞이고 엉클어지면서 별 볼일 없는 밋밋한 풍경사진, 더욱이 그것들을 2차원 그림으로 변환시켰을 때 작품성이 부여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일이다.
여기에 더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남아있다.
프레임 속으로 집어넣어 전체로서의 조화를 만들어내려면 이상한 정신적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자연은 그저 여기저기 아름다운 피사체들이 널려있지만, 사진은 자연을 소재로 하되 그 속에서 어떤 것을 형상화시키는 정신적인 사고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바위를 주제로 할까, 아니면 시냇물 자체에 포인트를 둘까, 또 물위로 떠가는 낙엽을 주제로 할까, 아니면 전체적인 색조를 우선시할까 등등해서 구도, 즉 프레임을 짜는 과정은 자연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의 정신적 사고과정이다.
눈앞의 자연과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도 그냥 셔터를 누르면 아무 것도 아닌 사진이 된다. 다시 말해 미적 흥취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사진을 통한 미적 흥취감은 작가의 정신적 사고라는 일종의 ‘필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흔히들 작가의 눈이라는 것이며 작가의 예술적 숙련도인 것이다.
프레임, 영어로 frame, 이게 실로 재미나고 희한한 것이다.
자연은 프레임을 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3차원 공간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은 프레임을 벗어나면 성립되지 않는다.
프레임을 두고 흔히들 ‘잘라낸다’고 말한다.
사진이나 그림의 프레임은 대부분 장방형이다. 장방형 속에 주제를 배치하고 부제들을 늘어놓음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반면 문학의 프레임은 분량이고 기승전결이다. 음악의 프레임은 시간적 분량임과 동시에 기승전결이다. 기승전결이란 말은 무엇보다도 끝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끝이 나지 않는 문학과 음악은 프레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훌륭한 사람의 傳記(전기)를 읽으면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 감동에는 실제 그 사람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도 있지만 전기 작가가 기승전결로 마무리하는 예술적 구도를 통해 더 많이 주어진다.
그리고 전기는 대부분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출간된다. 죽지 않은 사람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기에 기승전결의 ‘결’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빌 게이츠의 얘기를 다룬 책이 있다고 하자. 읽고 나서 받는 감흥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다만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빌 게이츠가 죽은 뒤, 전기가 나오면 마무리가 되었기에 작가는 예술적 기법을 최대한 발휘하여 기승전결을 꾸며내니 독자들에게 그 사람의 삶을 예술적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살아있는 빌 게이츠의 삶이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삶은 아직 自然(자연)인 것이지 藝術(예술)이 아닌 것이다.
자연이란 말은 빌 게이츠도 코를 후빌 것이고 당신도 무료하면 코를 후빈다는 말이다. 아름답기도 하고 후지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도 되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나 빌 게이츠가 죽은 다음 작가가 글을 쓰면 예술이 될 것이고, 뛰어난 작가라면 보통의 평범한 당신이 죽은 뒤에도 얼마든지 전기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술은 프레임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예술은 바로 프레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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