幼年(유년)에 대한 회상  _  2009.8.28
하늘이 많이 높아졌다. 아직 뭉게구름 있지만 높은 창공을 떠도는 실구름들이 거리감을 부여하고 있다.  

‘하늘이 많이 높아졌다’는 표현은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배우게 되는 말이다. 어릴 적에 이 말을 들으면 하늘이란 것이 높아지고 낮아지고 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늘이 낮아지면 나쁜 건가요 하고 염려스런 마음으로 묻기도 했다.

‘술을 많이 먹어서 병이 들었대’ 하는 어른들의 말을 엿듣고, 속으로 소주 댓병이 통째로 몸속에 들어가면 얼마나 아플까 하는 동정심,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 큰 유리병을 몸속으로 넣을 수 있지 하는 궁금증으로 잠을 설친 기억도 난다.

‘언젠가 사람은 죽기 마련’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럼 엄마도 죽는 거야?  했더니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고, 이에 ‘착한 어린이’를 맹서하며 울었던 기억도 스친다.

화투는 으레 할머니로부터 배우게 된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부랴부랴 화투를 찾아 들고 담요도 후딱 가져와서 펼쳐놓고 졸랐다. 부모는 아이의 어깃장을 성가셔하지 곱게 보지는 않는다. 떼쓰는 아이를 귀엽게 받아주는 존재는 세상에 그 아이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밖에 없다. 그러니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정말로 불쌍하다.

겨울 긴 밤, 화투로 재수점을 떼어보시던 할머니가 ‘오늘은 소식이 오겠구나’ 하시면 응? 소식? 어떤 소식일까? 하며 채근하던 기억, 그러면 환한 웃음과 함께 ‘아이구 이 놈’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幼年(유년)의 기억들은 그저 즐겁게 뛰어놀고 모든 것을 궁금해 하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궁금해 하는 마음은 나이와 함께 또 세상을 알아가면서 서서히 옅어져갔지만 실은 더 진지해져갔다.

초등학교 시절, 한 반이 88 명이었다. 콩나물 시루라고 하길래 ‘애들아, 우리가 콩나물이래, 콩나물’ 하며 키득거렸다. 김콩, 박콩, 최콩 하면서 놀았다.

매일 손바닥 발바닥 종아리 맞는 것은 생활의 일부였다.

맞는 것은 아프고 겁도 났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내 잘못이라 여겼기에 억울한 마음은 없었다. 그저 아프지 않게 맞는 요령을 놓고 급우들끼리 갑론을박이 무성했을 뿐이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다시 등교한 교실은 왜 그리도 춥던지, 조개탄이란 것이 있어 학교 헛간에서 열심히 가져다가 난로에 넣었지만 시린 발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춧가루를 신발 안에 깔면 덜 춥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 바람에 교실은 온통 고춧가루 천지, 여기저기 재채기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6학년에 오르면 중학교 본고사가 있던 시절이라 지독한 공부가 이어졌다.

88 명 중에서 절반 정도는 중학교 진학을 못 할 형편이었기에 한켠 구석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나머지 절반은 눈에 불을 켠 담임 선생님의 질타와 매질로 한 해를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3-4 학년 까지는 달걀 귀신과 붉은 종이 귀신, 분신사바와 비오는 날 아기 귀신이 주된 화제였지만, 5학년부터는 전혀 다른 실재하는 공포가 밀려왔고 아이들은 전율했다.

어느 반 담임은 아이들을 세게 때리기 위해 매일 아령을 한다는 소문, 알통이 장난이 아니라는 얘기, 어느 반 담임은 예전에 검도를 했기 때문에 한 대 맞으면 허벅지에 즉각 줄이 가고 피가 터진다는 소문, 실제 눈으로 보았다는 경험담, 때리지 않고 꼬집다보니 살점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옆 학교의 괴기담 등으로 우리는 무서워했고 또 즐거워했다. (공포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면이 있다.)

철저한 암기 과정이었다. 주입식 교육을 흔히 문제라 하지만, 실은 주입해놓고 세월이 가면 절로 응용이 되는 것이니 최고의 교육방법이 아닌가 싶다.

도장에서 무술을 배울 때에도 일단 型(형)부터 무조건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절로 그 형과 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서 실력이 느는 것과 같은 이치.

중학교 본고사는 전 과목 시험이었기에 심지어는 초등학교 시절 배운 음악교과서의 거의 모든 내용, 곡명은 물론 계명과 리듬들을 지금도 상세하게 떠올릴 수 있다.  

미솔도미솔 파라라 솔시레파미레도, 이곡은 독일 민요에 가사를 붙인 ‘깊은 산속 옹달샘’이란 동요의 계명인 바, 아직도 외우고 있을 정도이니.  

나중에 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였고 지식이란 거기에 조금씩 살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1952 년 이후 약 10 년 이내의 출생자들이 다닌 초등학교는 그냥 학교가 아니라 少林寺(소림) 부설 초등학교였던 셈이다. 공부에는 모두 선수였던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두 가지 문제와 조우했다.

첫째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그냥 때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 변태스럽게 아이들을 팬다는 사실이었다.

분필 날리기 신공에서부터 출석부 구타신공, 주전자 두껑 신공, 2 밀리미터에 불과한 머리털 뜯기 신공, 웃으시다가 돌변해서 눈앞에 있는 놈부터 마구 난타하시는 선생님, 심지어는 양들의 침묵처럼 귀를 물어뜯는 선생님도 계셨다. 새삼 웃음이 난다.  

한 1년 지나니 적응이 되었다.

더 문제는 섹스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였다.

가장 황당하고도 끔찍했던 진실은 엄마 아버지가 그 ‘흉측하고도 망측한 짓’을 하고 나를 낳았다는 사실이었다. 출생의 더러운 비밀에 대해 알게 된 나는 한동안 엄마와 눈도 마주치길 꺼렸다.

그런데 묘한 것은 짝꿍으로부터 자위-당시 우리들은 핸드 플레이라 했다-를 배우고 그 묘한 쾌감에 몸을 떨고 나자 눈을 떴다. 삶에는 차원 높은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들은 그 차원 높은 세계를 아시는 聖人(성인?)들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통 즐거움이란 맛있는 것을 먹거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代價(대가)가 따른다. 아무런 돈도 요구하지 않고 몸 자체 속에 그런 오묘한 즐거움이 숨어있다는 사실은 실로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러자 반 아이들이 빨간 책을 열심히 돌려 읽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빨간 책은 나쁜 책이라 알고 있었는데, 나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재해석이 필요할 정도였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행동 속에는 ‘뭔가 쾌감이 숨어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뻔 했다.  

중학교 1학년 가을 무렵, 그림 솜씨가 좋던 나는 그 빨간 책의 내용을 만화로 옮기기 시작했다. 대략 250 개 그림에 50 페이지 정도의 포르노 만화책이었는데, 당초  용도는 내 스스로 자위할 때 쓰기 위함이었는데 어쩌다가 다른 아이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무리 찾아도 손에서 손을 옮겨 다니면서 회수할 수 없었다. 포르노 만화가로서의 내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나는 그럴수록 死色(사색)이 되어갔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불렀다. 갔더니 선생님께서는 그 만화책을 살피고 계셨다. 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나는 죽었다, 무기정학은 기본이고 ‘빠따’도 아마 50 대는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흘끗 나를 보시고 웃으시더니 ‘혹시 너도 이 만화책 본 적 있니?’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일단 ‘아니오’ 했다.

뻔한 거짓말로 우긴 것인데 의외로 약발이 먹혔다.

‘그래? 내가 부른 것은 네가 그림을 잘 그리니 혹시 이런 거 따라할 까 걱정이 되어서’ 하시면서 눈앞에서 그 만화를 갈기갈기 찢으시는 것이었다.

풀려난 나는 어리석게도 선생님이 내가 한 짓을 정말 모르셨는지에 대해 고등학교 진학 당시까지도 긴가민가 하면서 판단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멍청하기는...

가장 그럴듯한 ‘자기기만’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좋아하는 여학생을 눈으로 찜해놓고 마음이 들뜨면 이건 플라토닉이야 하면서 스스로 우겼다.

섹스에 대한 엄청난 욕망으로 힘들어했지만, 그 욕망을 위장하고 감추는 방법도 날로 능숙해져갔고 발전해갔다. 속과 겉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던 셈이니, 돌이켜보면 바로 그 때가 幼年(유년)으로부터 젖을 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50 중반이 되자 섹스에 대한 욕구는 이제 내 속에서 그 뜨거웠던 실체, hot stuff 가 아니라 점차 관념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의 때는 먼 옛날 유년의 젖줄을 떼던 시절과 반대의 삶,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때가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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