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아빠는 수퍼 강아지  _  2009.7.19
토끼 한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단란하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버려진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고 그 사이에 토끼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는 난장판, 문자 그대로 액면 그대로 ‘개판’이 되어버렸다.  

벌써 오는 화요일이 토끼 사십구제이니 제법 시일이 흘렀다.

그 사이 들어온 강아지 중 한 마리는 이제 적응이 되었지만 여간한 기력이 아니라 온통 집안을 어지럽히고 다닌다. 뻗치는 정력 탓이리라. 또 한 마리는 여간 까칠하지가 않아 성가시다. 그 와중에서 기존의 늙은 강아지는 기운에 치여 구석으로 피신하고 있으니 여간 미안하지 않다. (이 단락 속에 ‘여간’이란 말이 몇 번이나 들어있는지 헤어 보시길.)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우는 것은 한 마리를 키우는 것에 비해 몇 배나 힘들까? 란체스터 법칙에 의하면 3의 제곱은 9, 따라서 아홉 배의 힘이 든다.

처음에는 강아지가 세 마리나 되어 나도 좋았고 아내와 아들, 어머니 모두  좋아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어머니는 아내에게 은근히 눈총을 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들은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 역시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두 마리에서 한 마리 더 데리고 들어올 때 아내는 내게 의향을 물었고 아들에게도 물었다. 집 근처 자동차 밑에서 비오는 날 처량하게 있는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아내였기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집안이 개판이 되고 아들은 자기 방의 컴퓨터에 강아지 한 마리가 오줌을 한 번 싸고 나자 엄마 탓을 하기 시작했다. 정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아들은 아내의 잘못을 기정사실로 만들고자 나를 보며 ‘의미’ 가득한 눈짓을 보내왔다.

마침 나도 강아지들이 성가신 터였기에 그 눈짓에 동의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아내는 제대로 방어를 못하고 기가 죽는 표정이었다.

아내는 한 마리 더 들이자는 것에 대해 나와 아들이 동의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문제를 저질렀다는 점에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순한 아내인지라.  

다시 며칠 뒤 까칠한 강아지가 어머니를 보고 크게 짖어대는 바람에 어머니의 노여움을 샀다. 그러자 아내는 까칠한 강아지와 함께 매장되는 분위기였다.

원래 있던 착한 강아지는 이름이 ‘가을’, 까칠한 강아지는 ‘또복’, 제일 늦게 들어온 힘찬 강아지는 ‘봉’이었는데, 어느 사이 나와 아들은 또복이를 까칠이, 봉이를 멍청이로 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까칠이와 멍청이의 난장판으로 해서 늙은 가을이가 구석에 피신하는 것을 보면서 아들과 나는 까칠이와 멍청이를 뭉텅그려 저 ‘잡것’들이라 부르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늙은 가을이는 정말이지 귀족스러운 면모로 가득했다.

이윽고 어머니마저 ‘잡것’이라는 말에 웃으시면서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집안은 개판이었고, 네 식구와 세 마리 강아지가 어울려 온톤 정치 공세와 이념 갈등으로 얼룩이 졌다.

까칠이와 아내가 너무 몰린다 싶어 드디어 나는 중도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들이 더욱 강경하게 나왔고 어머니마저 까칠이에게 한 번 물린 뻔 했던 사건 이후로 아내가 까칠이를 너무 끼고 도니 정국이 더욱 혼란해진디고 저녁 상머리 앞에서 공개비판을 하셨다.  

中道(중도)는 어려운 길이다. 중도란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 따라서 선악을 가리고 시비를 밝혀야 속이 시원한 여론 앞에서 늘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가정을 총책임진 권력자의 입장인 나는 마침내 화두를 던졌다. “어머니, 그리고 아들, 저 놈 중에 한 마리를 다시 밖에다 내다 버릴까요?”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고 아내는 눈을 크게 한 번 감았다 떴다. 구원의 손길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런 얘기는 아니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셨고, 아들은 입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늦가을만 되면 저 두 놈들도 같이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을이도 안정을 찾을 거예요’ 라고 못을 박았다.

사실 성가신 구석이 하나 둘이 아니다.

기존의 가을이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건만 스스로 약간 젊은 놈들에게 밀리는 기색이고 심지어는 집안 여기저기에 오줌을 지려 영역표시를 하는 망발을 보이고 있다.

또 까칠이는 워낙 학대를 받았던 모양인 지 자다가 나쁜 꿈을 잘 꾸고 그러면 별안간 으르렁거리며 짖어대니 한 밤중에 온 식구를 깨운다.

그리고 엄마 곁자리를 봉이, 그러니까 멍청이가 침범하면 사생결단의 자세로 공격을 하고 그 바람에 시끄럽기 짝이 없다. 아내는 아파트 이웃에서 한 소리 들을까 싶어 표정이 하얗게 질리곤 한다.

멍청이는 그래서 내가 데리고 자면서 많이 안정되었지만 워낙 활발한 성격에 현관 근처에 누가 오기만 하면 사정없이 짖어대는 버릇, 그리고 버려졌던 시절에 푸른 제복 차림의 경비 아저씨로부터 학대를 당했는지 산책길에 비슷한 아저씨만 만나면 이빨을 드러내고 마구 으르렁거린다. 더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물어뜯는 버릇도 있다.

말고도 문제는 더 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한 식구가 되었으니 유기되었던 강아지들의 속에 도사린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함께 가는 수밖에.

뒷산 산책 길에서도 봉이, 그러니까 멍청이는 사람을 여전히 경계한다. 특히 강아지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도 강아지도 서로 무서워서 으르렁거린다. 그러니 아내는 혹시 강아지가 사람을 물까봐, 또 사람이 강아지를 발길로 지를까봐 늘 걱정이다.

다행히 또복이는 사람을 피해갈 줄 알기에 산 중턱 정자에서 풀어주어도 되지만, 봉이는 그럴 수가 없다. 아내는 기력이 넘친 봉이를 풀어주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물론 아내 혼자 강아지 세 마리를 산책시키는 것은 벅차고 어렵다. 얌전한 강아지들이면 모를까. 늙은 가을이는 무릎이 약해서 계단을 내려오기가 어렵다는 점도 있다.

그래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온 식구가 나선다. 아들이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 나는 힘을 실어 눈총을 쏜다, 그러면 따라나선다.

가을이는 전혀 묶을 필요가 없는 순한 강아지, 산책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목줄만 들고 나서면 된다. 두 마리 ‘잡것’들은 일단 묶었다가 산책로에 들어서면 까칠이는 풀어주고 봉이만 묶고 간다.

강아지 물통, 사람 물통, 부채, 핸드폰을 챙긴 아내, 잡것 두 마리를 데리고 나서는 아들, 나는 뒤뚱거리는 가을이와 보조를 맞춘다. 사람 셋 강아지 셋의 산책길이다. 가끔 어머니도 동행한다. 좁은 산책로 길에서 보면 전후해서 10 여 미터에 달하는 大軍(대군)이다.

산 중턱 정자에 올라 강아지들에게 물을 먹이고 까칠이는 풀어주고 조심스레 지나는 이가 없다 싶으면 멍청이도 풀어준다. 늙고 뚱뚱한 가을이는 정자 그늘에 그냥 머물고 아들은 언제든지 사람이 나타나 봉이와 말썽이 날 것을 대비한다.

아내는 함께 나서줘서 고맙다는 표정이다. 나는 정자 몇 미터 앞 토끼가 묻힌 장소를 가서 살피기도 한다.

정자로부터 내려올 적에는 관절이 약한 뚱뚱한 가을이는 나와 아들이 교대로 안고 내려오고, 아내는 두 마리 강아지를 줄에 묶고 내려온다.

집안에 들어서면 서둘러 아내가 강아지들을 씻기고 나면 땀이 많은 아들과 내가 차례로 샤워를 한다. 그것으로 캠페인은 끝이 난다.

정치는 피곤하다. 말도 되지 않는 중도논리를 펴야하는 국정운영 책임자는 더 괴롭다. 修身齊家(수신제가)가 이토록 힘겨우니 감히 치국평천하를 넘보랴!

돈 벌어오고 어머니 모시고 식구들을 챙기고 아픈 과거를 지닌 강아지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수퍼맨, 수퍼 강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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