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또는 템포의 차이, 나를 미치게 하는.  _  2009.5.18
점심 무렵, 책방을 들렀다. 사무실에서 3분 거리의 강남교보문고. 월요일 오후 시간이 가장 한산하다. 늘 이 때 간다.

한 시간 정도 책을 들척거리며 즐긴 후 책 두 권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복병, 순간 약간 긴장되고 한편 맥이 풀렸다.

계산대 한쪽은 아가씨가 세 명, 그 옆은 두 명이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이 책을 열권 넘게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아마도 학교 선생이리라.

중간에 서서 잠시 어느 줄을 택할 지 망설였다. 어느 쪽이 빠를까? 오래 망설일 틈은 없다, 누군가 줄을 서버리면 밀려나니까. 뒤를 보니 한 젊은이가 접근해오고 있었고 나는 아가씨 세 명의 뒤로 붙었다.

순간 구매를 포기할 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참았다.

예상대로 내 앞의 세 아가씨는 모두 ‘긴’ 구매절차를 밟는다. 여성들은 물건을 살 때 자신들이 남자에 비해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 줄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른다.

책을 골랐고 사기로 했으면 계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나 같은 늙은 남자의 생각이다.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고 모르는 종업원과 말을 섞기도 싫다.  거기다 무조건 현금으로 한다. 내가 사는 책의 가격을 합산해서 미리 돈도 손에 쥐고 있고 잔돈을 얼마 받아야 할지 계산도 끝나있다.

재빨리 주민번호를 입력한 뒤, ‘현금영수증 해드릴까요?’ 물어오면 고개를 가로 흔들고 나서 다만 ‘영수증은 버리시고 거스름만 주세요’ 라고 말한다. 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계산을 마친 책밖에 없다.  

그러나 아가씨들의 구매는 길고도 멀다. 봉투를 달라고 하기도 하고, 봉투 값도 있나요 하며 뻔한 걸 약간 항의조로 되묻기도 하고 그런 다음 주민번호 입력하고 계산은 신용카드, 다시 사인하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말을 주고 또 받는다.

하지만 뒤에 서 있는 나는 이런 과정에 그만 녹아버린다. Melt Down! 그러면 아가씨가 무려 세 명인 줄을 왜 택한 것일까?

옆줄의 책 왕창 든 남자가 선생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선생들 역시 아가씨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긴 구매를 한다. 주문도 많고 ‘궁시렁’대기도 한다. 왜 이리 책값이 오르지 하고 불평도 하면서 카드도 천천히 꺼낸다. 그래서 아가씨 세 명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걸린 시간을 보니 내 앞의 아가씨가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그 선생처럼 보이는 남자도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남는 장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책을 살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 이젠 책 안 살 거야 하고 다짐하지만 마음이 또 어딜 그런가!

그러기 싫으면 온라인 구매를 하라고 누군가 딴에 코치를 해준 적이 있다. 온라인 구매를 하려면 많은 클릭과 신용카드 결제를 해야 하는데 카드를 쓰지 않는 나에게는 무용지물.

그리고 사무실로 택배가 되어야 하니 또 기다려야 하고, 무엇보다 실물을 보지 못하고 산다는 점이 싫다. 그러자 책을 고른 다음 온라인 구매를 하라고 했다.

실로 멍청한 어드바이스! 고른 책을 당장 읽고 싶지 그걸 배달까지 기다릴 여유가 어디 있냐고! 마치 분위기 잡고 실컷 애무하면서 달아오른 남자에게 메인 코스(?)는 내일 모레 택배로 보내드리지요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 그것은 ‘수컷성’에 대한 린치요 고문이다.  

책을 들고 길 건너 버거킹에 갔다.

책방을 들른 날은 웬만하면 버거킹의 주니어 세트를 먹는다. 보통 ‘버거’는 나에겐 너무 크다.

내 눈은 잽싸게 계산대 앞을 주시한다. 아가씨가 두 명, 경계신호 발동! 아니 저 신종인간들이 여기에도 두 명이나 있다니. 포기할 까 다른 데 가서 순두부 백반이나 먹을 것인지 빠른 시간 내에 판단하라,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빨리 판단하라. 머리 속은 경고 메시지로 가득하다.

나는 카드를 쓰는 아가씨들이 너무 싫다. 하지만 카드가 주범만은 아니다. 어차피 저 여자들은 말을 많이 하고 생각도 깊게 하면서 길고 긴 구매절차를 즐기는 탓에 카드가 범인만은 아니라는 점 알고 있다.

혹시 그래도 행운이? 하는 생각에 그냥 줄을 섰다.

오늘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대기 시간을 참기로 했기에.

내 아이디어는 과연 이 아가씨들이 어떻게 해서 긴 구매를 하는지 뒤에서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과연, 콜라를 빼고 스프라이트, 감자 대신 양파 링을 주문하고 있었다.

순간 그냥 ‘사이다’ 하면 세 글자인데 언제 적부터 ‘스프라이트’가 되어 무려 두 글자를 늘렸지 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만큼 주문 시간이 길어지쟎냐, 응 시키들아!

그리고 카드로 계산하고 현금영수증 처리하고 등등 잇는 절차 다 밟고 느긋이 돌아섰다.

뒤의 아가씨, 아니나 다를까! 그럴 줄 알았다. 메뉴 그림들을 보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할 거 뭐가 있다고, 먹고픈 것은 매장에 들어오면서 다 정하고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겠어, 응!

그 아가씨는 풀 코스였다. 감자에서 양파 링으로 바꾸면 얼마가 추가되죠?, 이에 대한 알바 종업원의 답변에 그러면- 하고 말을 끌기 시작했고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긴 컨설팅’에 들어갔다. 또 콜라 대신 커피를 주문했는데 커피에 대한 자신의 취향까지 손짓을 써가며 말했다.

꾸욱.

이 소리는 치미는 열을 내리누르는 소리.

두 명의 신종 강적들이 일을 마치고 내 차례. 너무나도 허무하고 간단하다.

‘주니어 세트’, 그리고 만원권을 내민다.
‘드시고 가세요?’, 끄덕.
‘현금영수증 처리해드릴까요?’, 설레설레.

그러면 ‘주니어 밀’하고 뒤로 전달한다.

아니? 왜 쟤들은 주니어 세트를 다시 주니어 밀(meal), 전문용어로 바꾸지? 왜 영어 단어를 차별하지, 세트라 해놓고 왜 또 밀로 바꾸지?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아예 주니어 밀로 주문하려 했다가 그만 둔 적도 있다. 그렇게 하면 알바 종업원이 ‘아니, 이 아저씨가 우리들의 용어를 알고 있네, 맨 날 버거킹만 먹나?’ 할 것 같았다.

물론 가격을 알고 있고 잔돈 액수도 알고 있다. 다만 남은 것은 버거가 나올 때 케첩을 두 개, 티슈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익숙한 알바는 그렇게 준다. 하지만 ‘시로도’ 알바는 케첩도 하나, 티슈도 꼴랑 두 장 정도 준다. 아끼는 마음이 아니라, 스치는 손에 잘 집히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을 써야한다.

약간 화가 난 탓에 후다닥 우걱저걱 버거를 먹어치우고 감자 몇 개 집어먹었더니 배가 벌덕, 순간 후회한다. 왜 나는 슬로우 템포로 먹질 못하는 걸까?

그래 어차피 조진 점심, 나가서 담배를 피워 물자, 그러면 스트레스가 없어질거야.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옛날 로마에서 기차표 한 장 사는데 내 앞에 겨우 8 명이 줄을 섰건만 표를 끊을 때까지 무려 두 시간 걸렸던 악몽이 새로웠다. 그들은 표를 사는 것이 아니라, 창구에서 매표원과 여행에 대해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악습이 우리 대한민국에도 어느 사이 ‘신종 플루’처럼 번성하고 있다.

나는 아가씨들을 좋아한다.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구매 중에 있는 모든 여성과 아가씨들-all girls and ladies in buying-은 단연코 싫다. 남자는 물건을 사지만 여자는 구매절차를 늘 새롭게 창조하면서-따라서 시간도 더 걸린다-즐긴다.

적과의 동침, 어쩔 수 없는 세상인가?

그러니 이젠 민주화 됐다, 오케이!, 구매 여성의 폭압으로부터 이 가련한 중년 남성을 해방시켜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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