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회관 철거에 대한 斷想(단상)  _  2009.9.11
전경련 회관이 신축을 위해 현재 철거 중이라 한다, 몰랐던 일이었는데 소식을 접하고 묘한 것들을 느끼게 된다.

전경련 회관은 우리 재계를 상징하는 건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를 상징하는 건물이라 생각한다.

1964 년 시작된 우리 국운의 봄은 15 년이 지난 1979 년으로서 여름을 맞이했다. 바로 그 때 우리 기업인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투자해서 세계로 뻗어가고자 했던 소망을 담은 건물이 바로 여의도에 들어선 전경련 회관이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이 30 년이 지나 우리 국운의 겨울이 시작되는 2009 년 오늘에 와서 철거되고 있다고 하니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우선적인 소감은 이제 한 시대가 마감되고 있구나 하는 점이다.

1976 년 우리 국운의 파종기에 뿌려진 씨앗들은 30 년이 지난 2006 년 추수기에 와서 너무나도 크고 풍성한 수확으로 돌아왔다.

기업만이 성공한 것이 아니고 국민 전체가 유례없는 풍요를 누렸기에 하는 말이다.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 빈곤의 문제 역시 성공의 후유증이다.)

그러니 1979 년의 회관 건립이 파종을 거의 마친 뒤 장차 더 열심히 농사를 짓겠다는 일종의 각오 내지는 결의를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2009 년 신축을 위한 해체는 풍성한 수확을 기념하는 일종의 추수감사절 행사라 하겠다.  

다만 3 년이 늦어졌다는 점이 있다.  

1973 년에 부지를 확보하고 1976 년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가 1979 년에 완공되었으니 여기에 30 년을 더해보면, 2006 년에 해체와 함께 공사에 들어가 금년 2009 년에는 완공되었어야 한다. 그것이 2012 년에 완공된다니 3 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늦어진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그간 기업에 대한 정서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3 년의 시차.

이 지체된 3 년을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늦어진 3년이 장차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인지 현 시점에서 판단하긴 아직 이르다 하겠다. 새옹지마란 말처럼 화가 복이 되고 또 복이 화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인지라.

아울러 아직은 낡은 건물을 철거 신축하는 방식이 내외장 공사를 통해 재활용하는 방식보다는 먼저 다가오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직 우리가 환경과 재활용이란 가치보다는 획기적 개발을 더 중시하고 편하게 여긴다는 하나의 傍證(방증)같기도 하다.

개발 우선의 사고가 수많은 산과 내, 고찰들을 시멘트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에 우리는 그토록 마음을 많이 다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 또한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놓고 사람에 따라 우리의 후진성이라 말하는 이도 많지만 나는 우리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가 ‘젊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니 이 또한 세월의 연륜과 경험을 통해 철이 들지 않겠는가!  

묘한 점은 또 하나 있다.

흔히 중소기업이 성공을 거두고 대기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신축 사옥을 짓게 되면 그 때부터 시련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무시할 경험만은 아닌 것이니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건물이 완공되는 시점이 2012 壬辰(임진)년이란 점이 그렇다.

나는 우리 경제가 내년부터 시련기로 들어가 2012 년 무렵이면 제1차 바닥을 치는 시점이라 추산하고 있다.

이번 해체되는 건물의 3 배 규모인 지하 6층 지상 54 층의 여의도 랜드 마크 건물이 들어서는 시점이 우리 기업들의 본격적인 시련기가 된다면 그 또한 다시 한 번 경험칙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케이스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묘하게도 2006 년 무렵, 나는 일이 있어 전경련 회관을 들렀던 적이 있다. 잠시 시간을 내어 건물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2 층이었던가, 넓은 로비에 전경련 회관의 건립을 기념하는 대형 동판이 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초록색 배경에 구리 빛 銘文(명문)의 글자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1979 년 11월 16일-정확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로 준공되었다는 내용과 건립에 출연한 기업들과 그 기업주들의 이름들이 돋음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를 장식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록물이었다.

음양오행으로 1979 년은 우리 국운의 여름이 시작된 무렵인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실로 많은 것들을 느껴야 했다.

음양오행을 다루는 사람의 본령은 역사를 예측함에 앞서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더 우선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그 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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