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신이 내린 선물(상)--역사 이야기 시리즈 제4회  _  2009.5.25
저번에 이슬람 제국의 수도가 바그다드로 이전하면서 이슬람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를 했다. 이번 글의 소재이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는 632 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종교적 열정과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의지로 뭉친 유목민족 아랍인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상을 정복해갔고 이슬람을 전파했다.

그러나 칼이냐 코란이냐를 강요했다는 얘기는 완전 날조된 얘기. 이슬람이야말로 傳道(전도)에 있어 ‘푸시’하거나 우격다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역사법정이 있다면 엄청난 손해배상 소송감이다.

그들은 겨우 20 년 만에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이란과 아프리카 북안을 모두 정복했다. 그 엄청난 팽창은 당연히 아랍인 내부의 분열을 만들었고 내전이 있었다. 이 내전을 정리하고 권력을 잡은 ‘우마이야’란 영웅은 661년에 이슬람 왕조를 세웠다. 우마이야 왕조라고 한다.

우마이야는 메카나 메디나가 아니라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수도를 정했다. 아랍인들은 처음부터 무역상이었기에 교역에 편리한 장소를 수도로 정했던 것이다. 이 왕조는 750 년까지 이어졌다.

초기 이슬람의 칼리프는 소박한 민주적 전통에 바탕을 둔 종교지도자였으나 부와 권력의 팽창으로 인하여 급속도로 세속적 제왕이 되어갔다.

우마이야 왕조의 문제는 아랍인만을 우대했다는 점이었다. 제국은 이미 세계 제국이었기에 피지배 민족의 엄청난 불만을 낳았다. 특히 문화수준이 높았던  페르시아 인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이에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의 사촌에 해당되는 압바스 가문의 ‘사파흐’는 그들의 불만을 奇貨(기화)로 삼아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에 대항했다. 결국 기존 왕조와 신흥 압바스 가의 싸움은 750 년 한판 승부로 결정이 났다.

사파흐는 ‘살육자’라는 뜻이고 정식 이름은 아부 알 압바스였다.

새 지배자가 된 초대 칼리프 사파흐는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들을 철저하게 학살했다. 다만 한 사람만이 살아남아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스페인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재건했고 그곳에서 300 년간이나 번영했다.

압바스 왕조는 초대 칼리프인 사파흐가 취임 4년 만에 죽고 그 이복형인 만수르가 제위에 올랐다.

만수르란 사람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 비유하면 대단히 정확하다. 태종 이방원에 의해 조선 왕조가 자리를 잡았듯, 압바스 왕조의 기초를 다진 것도 만수르였다.  

만수르는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할 때 적극 협력한 ‘시아파’ 사람들을 대거 살육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인물, 자신의 숙부와 명장 아부 무슬림까지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태종이 권신들을 모두 정리한 것과 동일하다. 중국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자신의 공신들을 거의 죽인 것을 보면 권력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기도 하다.

(호호당은 무수한 역사 속에서 권력이 들어서고 자리 잡는 과정에서 어떻게도 이처럼 동일한 일들이 반복되는지에 대해 그저 아연할 뿐이다.)

만수르는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새로운 首都(수도)를 찾았다.

새 수도를 찾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 점성술사였다고 한다. 이 또한 조선 왕조가 수도 한양을 정하고 통치를 확립함에 있어 무학 대사와 정도전, 하륜 등의 술사가 활약을 한 것과 같다.

점성술, 서양의 음양오행학인 점성술은 문화 수준이 높던 페르시아인(오늘날의 이란)들의 것이었다. 만수르는 궁정에 점성술사를 들인 최초의 칼리프였으니 이는 당초 미개민족이었던 아랍인들이 고급 문명에 동화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새로 찾은 땅은 오늘날 이라크와 이란의 경계를 나누는 자그로스 산맥의 서쪽 그러니까 이라크 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떨어져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가 이 지역에서는 불과 30 Km 거리였기에 그 사이를 운하로 연결하면 수송의 편리함이 대단했다.

만수르는 이 땅이야말로 세계교역의 중심센터가 되리라 확신했다. 이처럼 이슬람 사람들은 교역을 원천으로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만수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간직해온 곳이다. 먼저 온 자에게 이 땅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께 영광 있으라!”

새 수도의 이름은 바그다드였다. 그 뜻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는데 그 말이 참이다 싶을 정도로 바그바드는 입지가 뛰어났다.  

강에 둘러싸여 군사 방어도 좋았고, 강 사이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강과 육로가 발달하여 상업적으로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밤에는 서늘하고 모기가 없어 대단히 쾌적하다는 이점도 있었다.

신축 궁전의 첫 초석은 점성술사가 762 년 8월 어느 날을 택함으로써 놓여졌다.

전 제국으로부터 10 만 명의 사람이 노역에 동원되어 4 년이 걸린 끝에 직경 3 Km의 새 수도와 궁성이 완성되었다.

바그다드는 원형의 도시였다. 사통팔달로 전 세계로부터 교역의 기운을 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새 수도는 완만한 경사를 이룬 세 겹의 거대한 성벽과 그를 둘러싼 깊은 연못인 濠(호)가 동심원을 이루었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데는 무려 34 미터에 밑부분은 50 미터, 상단 통로의 폭은 14 미터의 거대한 성벽이었다.

궁전은 희게 빛나는 대리석이었고 그 옆에는 엄청난 이슬람식 탑인 모스크가 건립되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모스크가 있는 도시’라는 의미이니 한동안 이슬람의 통치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전문은 금으로 도금이 되었고 여러 신하들을 알현하는 푸른 물색의 방은 천정에 위치한 돔(dome)까지의 높이가 무려 36 미터였다.

돔의 정상에는 말을 탄 창기병 동상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했는데, 제국의 변방에서 비상사태가 나면 창기병이 그 방향을 항해 창끝을 돌렸다고 하는 전설도 전해진다. 낙랑의 자명고와 같으니 일종의 조기경보시스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원형의 도시는 직각으로 교차하는 큰 도로에 의해 4 개의 부채꼴 모양으로 구획이 나뉘었고, 곳곳마다 4 개의 큰 시장, 바자르가 형성되었다.

동북 쪽 바자르는 동쪽인 아시아와 북쪽 초원 지대로부터 유입되는 물품을 거래하고 동남 지구 시장은 인도나 동남아시아 쪽 물품, 서남쪽은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이나 이집트 아프리카 쪽의 물품, 서북쪽은 동로마 제국과 지중해 방면의 물품을 취급했다고 한다. 가히 글로벌 교역의 센터였던 것이다.

성 외곽에는 민간 도시가 자리를 둘러싸고 발달해갔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엄청난 이야기책에는 신드바드의 일곱 번에 걸친 대모험담이 나온다.

엄청난 돈을 벌어 바그다드의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은 뒤 회고조로 전개되는 그의 얘기는 이처럼 이슬람 교역상들이 이국만리에서 겪은 다양한 모험담을 모은 것이다. 진기한 물품과 모험담, 듣도 보도 못한 奇聞(기문), 물론 거기에는 언제나 뻥이 가미되는 법이어서 더 재미난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 상인들은 교역로가 되어준 인도양과 남양 군도의 바다, 또 지중해를 ‘알라(하나님)의 연못’이라 불렀다. 알라의 연못은 때로 험하고 거칠지만 알라를 믿고 의지하면 진실로 고요한 연못이 되니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이슬람 상인들은 얘기했다.  

그러면 진주와 용연향, 정향, 후추, 생강, 그리고 다양한 금은보화를 얻어내고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얘기했다.

이런 생각은 바로 오늘날의 벤처캐피털에 해당된다. 그러니 이슬람의 하나님은 벤처자본과 교역을 가능케 한 최후의 의지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른 문명권과 크게 대비가 된다 하겠다.

이처럼 당시의 바그다드는 중국의 장안과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오늘의 이스탄불)과 함께 세계 최대 으뜸의 도시였다. 물론 화려함은 바그다드가 최고였고 시장에 유통되는 물품은 교역과 장사를 우선으로 하는 나라인지라  중국이나 동로마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기존의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수도가 東遷(동천)하자, 이슬람 세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다음 글에서 무엇이 변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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