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글로벌 세계를 만든 이슬람 상인(상)--역사 이야기 시리즈 제2회  _  2009.5.20
일반적으로 글로벌화의 출발을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을 꼽는다. 그러나 이는 서양 친구들의 사기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보다 근 4 백년을 앞섰던  이슬람 상인들이었다.

몽골의 원 제국이 색목인, 즉 이슬람 상인들을 크게 대우했다. 이는 그들이야말로 교역의 모든 기술과 노하우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어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부, 오스만 터키마저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 대제도 이슬람 상인들을 중용했었다.

중동의 모든 제국들은 건조지대라는 기후적 특성과 여러 대륙을 연결한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농사보다는 중계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그렇기에 중동의 대도시에는 반드시 바자르(bazaar, 시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참고로 이 ‘바자르’에서 파생된 말이 자선활동을 할 때 쓰는 용어 ‘바자회’가 그것이다.)

이스탄불과 카이로, 다마스커스, 테헤란, 델리 등의 이슬람권 도시에는 어김없이 바자르가 중심이다. 이들 나라에 관광을 가서 바자르를 즐기지 못하고 왔다면 구경 헛한 것이다.

그 바자르에는 현지 산품만이 아니라 먼 이국땅에서 생산된 무수한 물품들이 전시되고 팔려나갔으며 그 중에는 인간 노예들도 매매되었다.

이처럼 이슬람 문명은 시장이 중심이고 유통이 기본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士農工商(사농공상)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사를 우선으로 했던 중국을 비롯한 우리와 일본 등의 동아시아 문명권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중동에서 일어난 여러 제국들이 충분한 무력이 있음에도 동남쪽의 인도 대륙에 대해 그다지 탐을 내지 않은 이유도 그들의 눈은 교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나는 향료나 특산품을 받아다가 유럽이나 중국으로 팔아넘기는 데에서 나오는 교역상의 이익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정복에 따른 비용이 이익보다 더 크다고 느낀 셈이다.

이슬람의 통일 왕조들이 교역을 중시했다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실크 로드’를 들 수 있다. 실크 로드는 동과 서를 잇는 통로, 그들은 이를 통해 통행세를 받거나 중계 무역으로 끊임없이 부를 만들어내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의 비단길도 그들이 개척했다.

이슬람 문명이 절정에 달한 것은 무함마드의 유지를 이어 엄청난 팽창과 정복을 거듭했던 우마이야 왕조 (AD 661-750)를 대신하여 등장한 압바스 왕조 때였다.

당초 우마이야 왕조는 앞글의 주제였던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했으나 신흥 압바스 왕조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다. 전혀 새롭게 수도를 건설하니 바로  바그다드였다.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긴 것은 이슬람 문명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얘기는 중요한 대목이라 별도의 글에서 얘기하겠다.

압바스 왕조는 제 4대 칼리프가 된 하룬 알 라시드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왕국의 영토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제국이었고, 그를 통해 사실상 최초의 글로벌 상권이 등장했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오늘날 이라크의 수도)의 바자르에는 전 세계 모든 물품과 사치품들이 모여들었으니 ‘아라비안나이트’의 주 무대가 이곳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등장하는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고 부자였다. 오늘날 모든 중동과 이슬람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매일 거리에서 집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옛날 옛적 하룬 알 라시드 칼리프가 다스리던 시절에’, 이슬람의 모든 옛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황금시절에 대한 향수라 하겠다.

오늘날 뉴욕과 런던, 도쿄에 없는 물건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하듯이, 서기 700 년대 말 바그다드에 없는 물건은 세상에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의 바그다드는 오늘날의 뉴욕이었다.

유럽? 그저 변방에 위치한 이름도 잘 모르는 야만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나마 그리스 쪽에 동로마 제국이 있긴 했으나 하룬 알 라시드에게 대패해서 깨갱이었고, 음습한 서 유럽은 ‘사를르 마뉴’ 라고 하는 추장이 후진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처럼 유럽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반면 동쪽의 중국은 그래도 당 제국이 지네들 영역 안에서는 힘을 좀 쓰는 편. 한때 ‘당’은 고선지 장군을 앞세워 압바스 왕조에 덤볐으나 대패한 후 다시는 이슬람 영역을 넘보지 않았다.  

인도는 언제나 그렇듯 온순하고 그대로 두는 것이 이용가치가 더 높아서 그냥 두고 있었다.

그러니 압바스 제국은 명실 공히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아리비안나이트’하면 대뜸 ‘사치와 향락’이란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로 부와 사치를 누렸던 것이다.

이들이 그런 ‘럭셔리’를 누릴 수 있었던 원천인 교역에 대해 좀 알아보자.  

바그다드의 상인들은 걸프 만을 빠져나가 인도 서해안인 말라바르 해안에서 코코넛과 커피, 향료와 차 등을 구입하고 가져온 물건을 팔았다.

그리고 다시 인도의 남쪽 모퉁이를 돌아 북상해서 인도 동북의 겨드랑이 뱅골 만을 들리거나 동쪽으로 직항해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사이의 해협인 ‘조호르’ 수로를 통해 동남아 일대의 물품을 사들이고 또 팔았다.

오늘날 이 지역이 이슬람 문명권이 된 이유도 바로 그런 이슬람 상인의 교역 과정에서 정착과 정복, 동화의 과정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상인들은 여기서 멈추질 않고 북상하여 중국 서남부와 양자강 하구를 통해 교역을 했다. 중국 서남부에는 이슬람 정착촌도 만들었으며, 명나라 시절 대 항해를 지휘한 ‘정화’도 이 정착촌 출신의 이슬람 계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마광수 씨처럼 ‘馬(마)’씨가 있는데 이는 ‘말’이 아니라 ‘무함마드’의 변형 발음인 마호멧의 ‘마’인 것이니 원 조상은 이슬람인 것이다.  

당 제국 당시 우리나라 신라에는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을 중심으로 교역을 했던 바, 이는 이슬람 상인이 가져온 서역의 물건들을 수입하고 한반도의 물품을 팔아 부를 쌓았던 것이다. 청해진 해상권은 이처럼 이슬람 바다 상권의 경계에 위치한 연결 상권이었다.  

마누라의 불륜 현장을 보고도 노래한 태평한 ‘처용’이 이슬람 상인이란 설도 그래서 설득력이 있음이다.

이처럼 이슬람 상인들은 항해술의 천재였다. 훗날 이탈리아의 콜럼버스가 스페인 여왕의 후원 아래 서쪽으로 항해해도 지구가 둥글기에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항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이슬람 항해 기술 때문이었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이슬람 계통인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고 무어인들은 이슬람의 항해술을 배웠기에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은 뱃사람 전통이 강했다.

이슬람의 해상 실크로드에 대한 이야기는 실로 흥미진진하다. 다음 글에서 잇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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