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협영화 감상기(2)--무협 시리즈 제5회  _  2009.5.5
빌을 죽여라, ‘킬빌’이란 영화가 있다. 타란티노 영화를 보면 저 친구 나하고 똑같은 친구네 그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홍콩무술영화 키드이고 나 역시 그렇다는 점에서.

킬빌은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홍콩영화 키드로서의 자서전’이었다고 생각한다. 격은 많이 떨어지지만 ‘말죽거리 잔혹사’가 유하라는 사람의 젊은 시절 자화상이듯이 말이다.

무술영화 마니아로서 내가 애석하게 여기는 국산 영화가 다소 있다.

정우성 주연의 ‘무사’라는 영화. 액션 장면을 연출하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무사는 분명 새로운 경지를 창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이 영화는 무술 액션이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실로 재미없는 영화였다. 더군다나 2001 년 9월에 개봉하는 바람에 9.11 테러 발생으로 완전 흥행을 망친 재수 없는 영화였다.

정우성이나 주진모 안성기의 박력 있는 액션 연기는 실로 일품이었는데 무표정한 장즈이의 연기가 영화를 깎아먹었고 시종일관 ‘쌈박질’만 하는 바람에 마니아가 아니면 봐주기 어려운 영화였다.

아마도 이 영화에 써먹은 연출기법은 그러나 두고두고 다른 액션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긴다.

또 하나 마니아 차원에서 아까운 영화가 2003 년 개봉의 ‘청풍명월’이란 영화.

영화는 그저 그렇지만, 최민수와 조재현이 물이 얕게 흐르는 시내에서 펼치는 칼부림은 황홀한 정도로 아름다웠다. 흥행이 될 영화는 아니다 싶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영화 장르 마니아란 한 장면만 멋져도 그 영화를 기꺼이 봐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 바로 내가 그러니까.

돌아와서 얘기를 이어간다.

왕우에 이어 등장한 배우로 강대위가 있었다. 당시 우리들이 ‘깡다구’라 불렀던 그 강대위.

강대위는 여러 면에서 왕우보다 떨어지지만 ‘복수’라는 영화에서 살떨리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피바다 연출 전문의 장철 감독 영화 중에서 가장 피비린내 짙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

왕우에 이어 등장한 이소룡이 등장할 무렵 나를 완전히 ‘뻑’가게 만든 영화가 있었으니 그 유명한 ‘유성호접검’이다.

무술영화 중에서 가장 스토리 구조가 탄탄하고 스케일이 큰 영화였고, 허구이면서도 허구가 아닌 것 같은 그래서 마치 무협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이소룡이 등장해서 그 강력한 펀치와 발차기로 단숨에 무림을 평정해버렸다.

‘정무문’에서의 야수와도 같은 눈빛과 살인의 광기, ‘당산대형’에서 보여준 ‘무술을 통해 약자를 돌본다’는 武俠(무협)의 전형, ‘맹룡과강’ 라스트 신에 보여주는 리드미컬한 근육의 율동과 發散(발산), ‘용쟁호투’가 보여준 가을 물과도 같은 처연함.

이소룡, 한 줄로 압축하면 그 괴이한 소리, 심혼을 뒤흔드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귓가에 여전하게 울려온다.

이소룡이 보여준 박력으로 인해 여타의 모든 홍콩 무술영화가 보여주는 액션들은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재미가 없어져버렸다. 한마디로 뻔-하게만 느껴졌다.

이소룡의 사후 새로운 각도에서 그에 못하지 않은 박력을 보여준 것은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영화였다.

바로 1990 년에 개봉된 ‘장군의 아들’이었다. 그 영화를 본 나는 아, 드디어 우리도 한국형 액션을 만들었구나 하고 탄복에 탄복을 거듭했다.

결투 장면이 치고받고 하면서 길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노려보다가 정작 붙으면 불과 10 여초 안에 승부가 나는 액션. 그간의 결투, 특히 라스트 신에서의 결투는 ‘앙꼬’이자 ‘백미’인만큼 길게 연출하는 것이 정석이었는데 장군의 아들에서는 짧고 터프하게 끝이 나면서 더욱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야, 이거 완존 실전이쟎아!’였다.  

물론 무술영화에서의 흥취는 액션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화와 역사에 대해 일반 사람보다 훨씬 유식한-이런 자랑,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내가 재미를 느끼고 감흥하는 요소는 실로 다양하다.

그런 내가 이제 무술영화 그만 봐야 되는 거 아닌감? 하고 회의를 느끼게 만든 영화가 있었다. 이연결 주연의 ‘영웅’이었다.

2003 년 초 개봉된 영웅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짙었다.

장예모 감독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와 결탁을 했던 것 같다. 大中華(대중화)를 널리 선전해 줄 터이니 돈을 마구 쏘아달라는 장예모의 요청이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영화는 중국의 통일대업을 이룬 진시황과 그를 죽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진시황을 죽이면 통일대업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단하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객 이연결의 모습은 영화가 철저한 정치선전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장만옥이나 양조위가 중국 곳곳의 아름다운 명승지만을 돌아다니면서 보여주는 고난도 화려무비의 검술 장면들은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고 영화는 중화제국의 정당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였다.

아니 저런 정치선전영화는 무료로 보여주던가 해야지, 봐주는 것만도 눈물이 나게 고마워해야 할 것을 돈을 주고 보다니 내가 망령이 들었구나 싶었다.

영화는 예술이고 예술은 무엇보다 감상하는 즐거움이 목적이다. 메시지 전달이나 사상, 선전 등 그런 것이 눈에 먼저 밟히면 웃기게 된다. 마치 먼 옛날 ‘대한 늬우스’에 등장하던 정치 선전 같았다.

흔히들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그러면 나는 비웃는다. 영화를 대중예술이라 한다. 그러면 답이 나온다. 대중들로 하여금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영화인 것이다.

물론 대중의 예술에 대한 감수성은 영화 전문가의 감수성과는 당연히 다를 것이다. 특히 상업예술은 작가나 감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대중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으로 실패인 것이다.

대박이 났다고 하자. 그것은 성공이다. 대중을 속였든 아무리 천박하다해도  대중이 감흥을 받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영화는 상업적 대중예술인데 말이다.  

안 되겠다, 다시 돌아가야지, 이거 자꾸만 영화 평론 비스무리한 냄새가 나니 돌아가자.

이 모두 ‘영웅’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장예모 캐시끼, 빡유!

그런 후 킬빌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킬빌의 모든 장면들은 그간 보아온 수많은 무술영화의 재미난 요소들이 전부는 아니라 해도 골고루 스며있었다. 그래 이제 많이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대사처럼 ‘고마해라, 마니 무따 아니가’하는 생각.

킬빌은 타란티노의 홍콩영화키드로서의 자서전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그간 벌린 홍콩영화와의 애정행각에 대한 獻詞(헌사)이기도 했다. 바람둥이도 오래 놀면 예술이 되니 이제 ‘바람둥이 상’을 받고 은퇴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간 본 셀 수 없이 많은 무술영화들, 영화마다 나름으로 지닌 향취는 다 있었다고 느낀다.

마치 숱하게 편력을 거듭한 바람둥이가 회고하면서,
걔는 가늘게 찢어진 눈이 예뻤어,
걔는 호리낭청한 허리가,
걔는 은은히 풍겨오는 머릿결 내음이,
걔는 강렬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듯 했는데 등등 그런 거 말이다.

연인과 몸을 섞어보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이다. 공연한 말이 결코 아니다.

섹스는 음식에 곧잘 비유된다. 그리고 음식은 맛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맛이란 것의 80 %는 눈과 코를 통한 것이다. 혀와 이빨로 씹는 것은 사실 20 %도 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것이 사실 전부이고 씹고 삼키는 것은 별거 아님이다.

내가 스스로 가치를 부여한 사람 중에 미운 이가 어디 있으랴! 그것을 부정하면 바로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동안 빛을 발하는 것이고 사라진 뒤에도 그 빛은 추억으로 남는 법이니 이 마음을 어쩔꼬.

킬빌 이후로도 나는 무술영화를 즐긴다. 하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비유컨대 은퇴한 기생, 즉 退妓(퇴기)가 건넛방에 앉아 대청에서 현역 기생과 선비가 주안상을 놓고 노니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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