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軍國主義(군국주의)의 역사와 오늘의 일본 (상)  _  2009.10.12
금년 들어 일본에서는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자민당의 몰락과 민주당의 대승은 일반적인 변동의 범주에 속한다기 보다는 일본 정치의 근본적 地殼 變動(지각변동)이라 하겠고, 이는 일본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은 또 다시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한 일본에 대해 그 역사적 淵源(연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向背(향배)에 대해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러나 연원을 너무 멀리 거슬러가는 것은 의미전달의 긴장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메이지 유신이란 서구의 막강한 힘을 인식한 일본이 기존의 봉건 막부체제를 정리하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만든 뒤, 철저하게 서구를 모방함으로써 부국강병을 달성하고자 했던 체제변혁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촉발시킨 사건은 잘 알려진 바, 1853 癸丑(계축)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였다. 신식 전함을 이끌고 일본 앞 바다에 나타나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요건들이 상당 부분 성숙해있던 일본은 개항을 하나의 강력한 모멘텀으로 삼았다. 다음에 얘기하는 요건들은 일본이 어떤 연유로 메이지 유신을 통해 순식간에 서양을 모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변화의 요건을 알아보면 이렇다.  

첫째, 일본의 경우 자유상공업자인 죠닝-町人(정인), 저잣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신분상승이 뚜렷한 대세였다.

둘째, 蘭學(난학-네델란드 학문)으로 통칭되는 서양학문과 사조가 지식인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셋째, 서양에 대한 도자기 수출로 힘을 길러온 ‘사쓰마’와 ‘조슈’와 같은 지방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동맹을 맺어 막강한 세력이 된 사쓰마와 조슈의 연합체는 국권을 천황에게 되돌려줄 것을 막부에게 요구했고, 견딜 수 없음을 알고 막부가 물러난 사건이 바로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이 되었다. 1867 丁卯(정묘)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초 경쟁관계였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동맹을 주선한 것이 바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사카모도 료마’였다. 한자로 坂本龍馬(판본룡마)였으니 일본은 龍馬를 얻어 변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서양화, 서양 모방을 통해 일본이 주력한 것은 결국 서양식 군대의 양성이었다. 산업도 행정도 죄다 서양식 군대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 조성이었다.

양식 군대의 양성에 주력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일본이 武士(무사)의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무사계급들은 그저 칼을 쓰는 武人(무인)들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 이후 전란이 사라지면서 유교적 교양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武(무)의 바탕 위에 文(문)을 익힌 사람들이었기에 서양식 군사력의 양성에 주력할 수 있었다 할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1867 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에 대한 일방적인 모방에 반대하던 무사 세력이 일으킨 내란-서남전쟁이라 한다-을 거치면서 30 년도 지나지 않아 상당한 서양식 군대와 전함을 구비한 아시아의 새로운 군사강국으로 올라섰다.

일본이 軍國主義(군국주의)로 간 것은 결국 무사계급의 전통 위에서 서양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양화에 성공한 군국주의 일본이야말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커다란 우환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1895 乙未(을미)년은 일본의 국운이 다시 한 번 상승하기 시작한 해였다.

그 1 년 전 일본은 조선의 동학운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진주시켰다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당시 만신창이 청 제국을 단숨에 격파했다. 바로 청일전쟁이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분할, 특히 중국의 분할을 노리던 서구 열강들의 눈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 격인 청 제국이라 해도 일본에까지 패배하리라곤 상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대영제국과 미국은 러시아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일본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사실 우리 한반도는 서구 열강의 기준에서 아무런 영영가가 없었다. 워낙 빈곤해서 그들의 수출시장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부동항을 얻는다는 구실로 부단히 태평양으로 진출코자 했던 러시아, 그리고 미니 서구 열강을 흉내 내고자 했던 일본에게나 관심거리였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일종의 편먹기 경쟁을 통해 서로의 힘을 시험하는 소규모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주 무대는 어디까지나 중국이었고.

일본은 중국에서 받아낸 상당한 전쟁 승리 배상금을 몽땅 군사력 강화에 투자했다. 신식 전함은 우호적이던 영국에 발주했으니, 나중에 러일 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의 도고 제독 기함인 ‘미카사’가 바로 메이드 인 잉글랜드였다.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구도는 결국 1904 甲辰(갑진)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정확하게 10 년 뒤에 가서 러일전쟁으로 귀결이 되었다. (우리 조선은 그저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가 되어 어느 놈이 칼자루를 들게 되느냐를 지켜볼 뿐이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다시 일본이 승리하자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아시아의 신흥 강자로 대우하고 열강의 한 멤버로서 받아들였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조선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하나의 결론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서양화를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서구 열강의 알력을 이용함으로써  주권 유지를 희망해오던 대다수의 조선 지식인들과 상공인들, 그리고 지주 계층들까지도 눈앞에서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에 이기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가 을사보호조약을 제 아무리 규탄한다 해도,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 일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저 눈앞의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일반 국민들에게 이승만이나 안중근, 김구와 같은 애국 열혈한이 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 대목, 모두가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될 수는 없다는 대목이야말로 해방과 건국 이후 무려 60 년씩 이어지고 있는 친일논란의 핵심인 것이고 아직도 우리가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아픔인 것이다.

그저 다행한 일은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거물을 총으로 사살한 뒤 도주를 시도하지도 않고 의연히 체포되어 일본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항거했다는 사실이다.

안 의사가 보여준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암살과 같은 비열한 테러행위가 아니라는 점, 나라를 지키려는 무사의 의연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점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죽었으니, 한 목숨 버려 민족의 자긍심을 지켰으니, 우리 겨레가 이어지는 한 그 이름은 천대만대 이어질 것이고 우리 민족은 그 은혜에 천대만대 감사드려야 할 일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최근의 글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가 준비되고 있다’를 보충설명하기 위한 글들이라는 점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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