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와의 묘한 인연  _  2009.8.8
마광수 교수가 요즘 들어 서서히 안정을 찾고 의욕도 생겨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마 교수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친구가 읽고 있기에 곁에 붙어 야, 이게 바로 그 마씨 소설이야 한 번 좀 보자 응 하며 잠시-아마도 반쪽 정도-읽다가 윽-하고 구역질이 올라와 포기한 적이 있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당시 내 생각에 마 광수란 사람은 그냥 쓰레기였다. 어디서나 흔해빠진 그런 오물 덩어리였다.

그런데 묘한 것이 불과 반쪽의 독서경험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마광수라는 사람과 그의 글은 내 속으로 파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것이었다.

노골적인 섹스 장면의 묘사였는데 나는 왜 그리 그 순간 구토를 느껴야 했을까?

그런 글로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아니면 일단 튀고 보자는 천박한 의욕이 그런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고 너무 빨리 단정을 지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는 어디까지나 敍事(서사)보다는 抒情(서정)이 앞서야 한다는 오랜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어린 시절 재래시장에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다가, 닭 잡는 장면과 조우했을 때 느낀 그런 생경함 같은 것이었을까. 어떤 일도 처음 대할 때는 충격이 있듯이 그런 충격이었을까.

그렇기에 마광수라는 사람은 제법 긴 세월 동안 내 의식의 표면에서는 잊어버린 대상이었고, 의식의 이면에서는 부단히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재작년 무렵, 이 양반이 쓰고 거기에 삽화까지 곁들인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글보다 삽화를 보는 순간 나는 마광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잘 그리려는 마음을 가졌는지 아니면 붓놀림 자체를 즐겼는지 또는 그저 단순한 장난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린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있다. 왜냐면 나 역시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교과서에 노트에 참고서에 아니면 신문지에 그림이나 환칠을 해왔기에 그렇다.

그 삽화에서 나는 약간의 울적한 장난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선묘는 그가 본질적으로 분방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상당한 고집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니 그가 튀고자 하는 동기에서 글을 쓴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이런 판단은 당연히 내 개인의 주관적 영역이라 더 이상의 해석은 그만 두고자 한다.

‘생각이 바뀌면 대상이 다르게 보이고, 나아가서 대상이 달라져버린다.’

사실 이 말은 대단한 말장난이자 철학이다.  

대상이 나에게 정보를 주고 그를 통해 내 의식에 변화가 생긴다는 일반적인 인식의 수순이 아니라, 의식이 먼저 변하면 感受(감수), 즉 오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가 변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종의 초월이라 할 수 있는 작용, 감수되는 정보의 변화에서 그치지 않고 대상 자체가 아예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버린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어려운 말을 하느냐 하면 내가 마광수 교수의 삽화 몇 점을 보고 생각이 그 순간에 바뀐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을 하기 위함이다.

이미 나는 그 이전에 의식 깊은 곳에서 마광수라는 존재에 대해 씨름하면서 내 생각이 서서히 변해왔다는 것이며 그것이 삽화라는 다른 방식을 통해 조우하는 순간 내가 이미 변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마광수라는 존재까지도 그 순간에 변해버린 셈이다.

‘마광수 씨’라 하지 않고 ‘마광수라는 존재’란 표현을 쓰는 것은 그 개인의 개성에 관한 관심을 포함해서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일체를 포괄한다는 의미이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한국 유일의 성 문학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끝까지 野(야)하게 가겠다고 한다.

이 말은 얼마 전 쓴 거짓말에 관한 글에서 얘기했듯이 대단히 세련된 거짓말이라 나는 여긴다.

‘성 문학 작가’란 표현은 문학의 본질적 의미와 문학이 갖는 사회적 함의와 규정에 대해 따라서 체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덤벼보겠다는 일종의 도전장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젊은 혈기가 지배하는 ‘도전’이 아니라, 갖은 쓴맛과 단맛을 보면서 축적된  세월의 내공을 가지고 던지는 도전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끝까지 野(야)하게 가겠다는 것 역시 섹시하다는 의미의 ‘야성’, 이는 관능적 만족과 정신적 만족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만이 우리가 우리를 솔직한 눈으로 살필 수 있다는 의미의 철학적 도전이라 본다.  

이는 더 나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 존재를 다른 생명체 위에 둔다는 것이 인간의 자기기만이고 편견이라는 것, 인간과 여타 생명간의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도전, 즉 인간우월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본다.

아울러 性(성)이란 거대한 주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져온 인류 역사의 체제가 주는 중압감, 즉 부단한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해 결코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文氣(문기)로서의 ‘야성’을 끝까지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본다.

따라서 그는 지금 대단히 세련된 전략적 트릭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는 어쩌면 이미 자동차 혼잡한 도심을 방황하는 말이 아니라 초원을 세차게 달려가고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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