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에 가면 포달랍 궁전이 있다. 티베트 불교의 궁전이다. 인도와 티베트를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우리 국민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관광의 명소이다.
포달랍 궁은 한자로 ‘布達拉宮’이라 쓰지만 원래 산스크리트어 ‘포탈라카’의 音譯(음역)이다. 포탈라카는 불교에서 普陀珞珈, 보타낙가라고 한다.
포탈라카, 보타낙가는 華嚴經(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소개되고 있다. 보타낙가는 그래서 불교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다.
강원도 양양의 명찰 洛山寺(낙산사), 강화도 서편 석모도 洛迦山(낙가산)의 普門寺(보문사)가 그 대표적이다. 모두 ‘보타낙가’란 말의 일부를 딴 것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보타낙가’사 또는 ‘보타’사 그리고 ‘낙가’사 등은 모두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도량이다.
티베트 라싸의 포달랍 궁전도 마찬가지이고 중국 불교의 명승지인 보타사와 낙가사도 마찬가지이다.
관세음보살 도량은 관세음보살이 생명의 甘露水(감로수)를 뿌리시는 분이라서 바다나 연못 또는 물과 관련이 있는 장소에 주로 세워져있다. 낙산사는 동해 바다, 보문사는 서해 바다, 이런 식이고 바다가 없으면 반드시 연못이라도 있다.
관세음보살은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와 동일한 분이다. 모두 한 없이 자애로운 어머니들이고 실은 ‘하나’의 같은 어머니이다. 나는 예전에 관세음보살을 만나보고 싶을 때 멀리 절을 찾지 않고 동네 천주교당의 성모 마리아 상 앞에 서곤 했다. ‘마리아 보살님’이라 하면서 말이다.
사실 어머니가 계신 분이나 엄마가 있는 아이들은 관세음보살이 계신 절이나 마리아가 계시는 교회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종교란 것이 심오한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의지처가 되면 된다고 본다. 의지한다는 것, 의지처가 된다는 것은 때로는 떼를 쓸 수도 있고 생떼를 부리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찾아가서 기도하면서 복을 바라는 것을 다소 저급한 신앙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거야 많이 배운 사람들의 생각이고 求福信仰(구복신앙)이야말로 진짜 신앙이라는 생각이다.
생떼를 부리려면 아무래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아니 엄마가 좋고 편하다. 관세음보살이나 성모 마리아가 부처님이나 예수보다 더 인기가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엄마인지라 찾아가서 ‘생떼’를 써도 혼내거나 화내시지 아니하고 소원을 잘 들어주시며 잘못을 해도 틀림없이 용서를 해주시는 분들이니 진정 소원을 빌 것 같으면 관세음보살이나 성모 마리아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필시 영험하리라!
서두가 꽤 길어졌지만 오늘 하려고 하는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보이차’를 마시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던 인생 후배가 티베트 라싸를 다녀왔다는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래서 포달랍 궁전도 가 보았겠네? 하고 내가 물었고,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 대답에 나는 가슴 어느 한 구석이 저려왔다. 은은한 통증이었다.
이 글은 내가 왜 포달랍 궁이라는 말 한 마디에 아파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1955 년생인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 최초로 무협소설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그러니까 1968 년의 일이고 지금으로부터 32 년 전의 일이다.
처음 만난 무협소설은 내게 상당한 충격과 함께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는데 그 소설의 주 무대가 바로 티베트 라싸의 포달랍 궁 또는 보타낙가 궁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심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심등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군가에 의해 포달랍 궁에 맡겨져 절 안에서 수도하는 청년 수도승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매일 밤이면 은밀히 찾아오는 무림고수로부터 무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심등에게 무술을 전하고 있는 백발의 고수는 심등과 사제 간의 인연을 거부하고 무술을 전해줄 터이니 다만 한 가지 약속을 지켜줄 것을 제의하니 일종의 거래였던 셈이다.
이런 기이한 사연의 배경을 말하면, 아주 오래 전에 중원 무림에는 열 명의 고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변경지대인 티베트에서 온 고수에게 모두 패배를 당하는 모욕을 겪었다. 승리한 절대 고수는 언제든지 찾아오면 설욕의 기회를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에 무림의 10 대 고수는 복수를 위해 각자 한 명씩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을 발굴하여 무공을 전한 다음 30 년 뒤 티베트의 절대고수를 찾아가 설욕을 하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심등은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런 사연으로 사부 아닌 사부는 심등에게 무척 냉랭하게 대했고, 심등은 그냥 낮에는 수도승, 밤에는 무공연마를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약했던 시일이 다가왔고 예전의 10 대 고수는 각자 제자 아닌 제자들을 데리고 티베트 라싸의 특정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늙은 고수 10 명과 젊은 제자 10 명의 회합이었다.
그 장소에서 심등은 다른 고수의 여제자와 눈길을 교환하고 이윽고 사랑에 빠져들게 되지만 수도승의 신분이라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이 장면에서 중학교 1 학년의 나는 아, 왜 중을 하고 있냐고? 그냥 절에서 나와서 예쁜 사람과 잘 해보면 될 거 아냐? 하고 짜증을 부렸고 또 그렇게 상황을 설정한 작가를 원망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절대 중 같은 거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심등의 애매한 태도에 실망한 나머지 그 여제자는 마음을 접게 되는데, 기묘하게도 그 순간에 심등에게는 대단히 이채롭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인연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처녀는 바로 10 대 고수들이 이빨을 갈며 30 년간 복수를 준비해온 절대고수의 무남독녀였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뻔한 설정이지만 중학생의 순진한 나로 하여금 통한의 한숨을 짓게 만들었다.)
모두 무공을 익혔던 탓에 두 남녀는 영화 와호장룡의 한 장면처럼 나뭇가지 위를 날고 뛰어다니면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물론 심등은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심등은 그저 절세고수가 나쁜 사람, 10 대 고수 사부는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만 해왔지만, 사실 여기에 正邪(정사)와 善惡(선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10 대 고수들도 과거에 적지 않은 악행을 저질렀고 티베트의 절대고수도 역시 그랬으니 그냥 무림고수들 간의 패권다툼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등의 연인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부친을 해하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너무나 괴로워한 나머지 미쳐버리게 된다. 그러나 심등은 약속을 지켜야 했기에 이윽고 사부의 복수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심등의 사부아닌 사부는 심등의 부모님과도 알고 지내던 사이로서 심등이 핏덩이일 때 포달랍 궁전에 기탁했던 장본인이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부모님도 무림의 恩怨(은원)에 얽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사부로부터 전해 듣게 된 심등은 대단한 심적 충격을 받는다.
마침내 눈이 펄펄 내리는 티베트 높은 설원에서 마지막 결전이 벌어지고 10 명의 청년 제자들은 한 명의 늙은 절대고수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미쳐버린 심등의 연인이 깔깔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결과 늙은 고수는 숫자에 밀려 죽게 되고 열 명의 제자들도 상당수가 회복하기 어려운 부상을 입게 된다. 하지만 심등은 결정적인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에 허무함을 느낀 심등은 怨恨(원한)과 名利(명리)로 얽히고설킨 이 사바세계를 영원히 등지기로 결심하고, 포달랍 궁전의 육중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춘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한동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허무함으로 힘들어했다. 지금 나에게 그 기억은 끼이잉-소리를 내며 닫혀드는 육중한 절문의 경첩 소리로만 남아있다.
사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전체 줄거리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내가 처음 접한 무협소설이자 대단히 특이한 무협소설이었다. 대개의 무협소설은 좋은 놈은 좋은 놈, 나쁜 놈은 나쁜 놈인데 그 소설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엔딩도 대단히 허무하고 슬픈 결말이었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던 열 네 살 사춘기의 나에게 그 소설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대단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티베트 라싸란 곳에 가면 포달랍 궁전이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궁전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할 육중한 경첩의 대문으로 속세와 격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곳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포달랍 궁전의 문 앞에 서면 그 속으로 그냥 확 하고 들어가 버리고픈 충동, 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두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갈등을 빗을 것 같았고 그 갈등 사이에 서보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다.
그런 생각 위로 ‘다음에 네가 크면 이 엄마가 정해주는 참한 아가씨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잘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겹쳐지곤 했다.
생각건대, 내 속에는 성지로 향하고픈 순례자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고 한편으로 어머니의 말씀처럼 속세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당시 내 속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었던 모양이고 어쩌면 그 균형의 추가 이리로 또 저리로 오가는 것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로지 생각일 뿐이었다. 1968 년 당시 티베트 라싸는 세상 끝에 있었고 가볼 수 없는 땅이었다. 티베트는 당시로서는 中共(중공) 땅이었기 때문이다. 중국마저도 이른바 ‘죽의 장막’으로 쳐져 있어 가볼 수 없는 곳인데 티베트 라싸는 그 중국 내륙 서쪽 멀리 천만리 아득한 곳에 위치한 禁斷(금단)의 땅이었던 것이다.
살아서는 결코 가볼 수 없을 것으로 여겼던 포달랍 궁전이었다. 그랬기에 금지된 사랑의 열정처럼 더욱 진한 갈망이 되어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비밀스런 궁전으로 남았던 것이다.
포달랍 궁전 때문에 나는 ‘실크 로드’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우리와 중국은 수교를 했고 중국이 시장체제로 변모하면서 어느덧 중국이 빗장을 열었다. 내가 1993 년 서른아홉의 나이, 처자식을 거느린 막중한 책임을 진 가장이었던 내가 무턱대고 직장을 그만 두고 중국으로 떠났던 것은 실크 로드 때문이었고 돈황 천불동 때문이며 간절하기 이를 데 없는 포달랍 궁전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 우선이었고 또 전부였다.
그러나 정작 중국 땅을 밟게 되고 내 발걸음이 서서히 서쪽으로 향하게 되자 불현 듯 갑자기 그 곳에 가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성스러운 땅, 그러니 성스러운 땅을 함부로 밟아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라싸의 포달랍 궁전을 이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곳으로 여기기로 작정을 했다.
포탈라카산, 보타낙가산은 관세음보살이 감로수 병을 들고 목마른 중생들에게 뿌려주시는 곳, 그런 곳을 그냥 갈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탁한 塵世(진세)에 지치고 목이 마를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 목을 축일 곳으로 간직해두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티베트 라싸에 포달랍 궁전이 있다 해도 그것은 관광 명소인 것이지, 관세음보살이 거하는 보타낙가산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정말 좋은 것이 있을 때 쓰지 않고 아껴두는 마음 같은 거, 잔뜩 기대하다가 정작 보니 실망스럽기도 한 거,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포달랍 궁전을 찾아갔다가 그냥 소비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 싫었던 것이다. 아껴두고 밟아보지 않음으로서 내 마음 속 은밀한 의지처로 남겨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나는 聖地(성지)란 곳이 휙 하고 비행기 타고 차 타고 기차 타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야 한다는 나름의 聖地論(성지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티베트 라싸에 있는 포달랍 궁을 보이차를 함께 마시던 인생 후배는 다녀왔다고 했지만, ‘나의 포달랍’궁을 가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가보고 싶은 마음 또한 엄청 컸고 그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묘한 절충을 했다. 해마다 冬至(동지) 때면 강원도 낙산사와 홍련암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 내가 보타낙가산에 전혀 가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수시로 즐겨 찾고 있음이다.
그러나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남겨둔 라싸의 포달랍 궁전, 보타낙가산은 32 년 전의 아득한 세월 저편, 중학생이었던 내가 遭遇(조우)했던 신비하고도 두려운 곳이며 또 살 기력이 남아있는 한 결코 가보지 말아야 하는 아련한 곳이고 동시에 그곳에 이르는 길로서의 포달랍 궁이고 ‘보타낙가’산이다.
畏敬(외경)의 마음으로 멀리서 바라다만 보는 하염없이 성스러운 곳이고 또 그곳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밝힌다. 차마시던 후배가 내게 안겨준 은은한 아픔은 喪失(상실)의 痛覺(통각)이 아니라 숨 쉬고 살아있음에 대한 기쁜 확인이었던 것이다.
(써놓고 보니 묘한 글이 되었다. 보타낙가에 대한 교양적 소개로 시작해서 종교에 대한 생각, 그런가 하면 난데없이 무협소설을 소개했고, 또 그로부터 생겨난 인상, 그리고 지금 오십 후반의 내게 여전히 미치고 있는 강력하고도 막대한 영향력, 마지막으로 삶의 기쁨에 대한 것으로 마무리를 하니 말이다. 늦은 밤 비 내리는 소리에 잠시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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