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送年(송년)의 인사를 한 터이다.
일요일 놀이터에 나와 책을 읽다보니 문득 또 하나의 다른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던 책은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이란 낡은 史書(사서)였다. 먼 과거의 일을 적은 책이고 우리도 아닌 중국의 일에 관한 책이다.
흔히들 공자가 春秋(춘추)라는 책을 지은 것은 역사기술을 통해 微言大義(미언대의)를 밝히기 위함이었단 평가를 받고 있다. 미언대의란 역사의 正義(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은밀한 暗示(암시)를 남겨놓았다는 뜻이다.
이 평가에 대해 오늘날 대단한 찬반양론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언젠가 내 생각을 밝힐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다만 그 먼 과거지사를 대하다보니 문득 2009 년 말인 세밑을 겸하여 오늘의 우리에 관한 일에 대해 나름 하나의 마무리를 하고 그 인사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인사는 우리의 지난 반세기에 관한 것이다.
1960 년대 초,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치열하고도 각박한 경제발전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50 년이 지난 2009 년 말로서 우리는 60 년대 초에는 가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풍요를 누리면서, 세계적 경제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인사를 드리게 된 이유는 금년부터 우리 국운의 15 년에 걸친 소강기, 상징적으로 내가 겨울이라 표현하는 때가 시작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내가 말하는 이 ‘우리’는 이 블로그를 읽는 사람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 국민 전체, 그러니까 80 대의 노년층에서부터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청년층, 그리고 이제 겨우 철이 들기 시작하는 10 대를 아우르는 ‘우리’이다.
지난 50 년전 우리 사회는 세계 최빈국의 수준이었고 지금의 우리는 명실공히 선진국 수준이고 경제강국이다.
이 말은 그간 우리가 대단히 잘 해왔다는 말이다.
동시에 우리가 불과 50 년에 이렇게 놀라운 변신을 했으니 이는 엄청난 사회 혁명이고 변혁이었다는 점이다.
호호당은 비록 도시에서 출생했지만, 1955 년생이니 당시 우리는 농업사회였다. 그리고 베이비붐 원년에 태어났다.
농업사회, 또는 농촌경제라 했지만 당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구호물자, 옥수수와 밀, 가루우유가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 자체 식량생산만으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러던 우리가 어느 사이 공업화를 시작했고 또 어느 사이 정보사회로 들어섰다.
호호당은 태어난 이래 농촌경제와 산업경제 그리고 정보경제를 모두 경험했다. 이런 일이 어디 흔한가?
또 어설픈 민주체제에서 군부독재, 그리고 민주화 이행과 지방자치라는 분권화 시대를 모두 경험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어디 흔한가?
전화 있는 집도 드물었지만, 국제 전화를 한 번 하려면 몇 시간 전에 신청하고 전화국의 연결통지를 몇 시간이고 전화통 앞에서 기다려야 했던 시절에서 그냥 번호판을 두들기면 저렴한 비용으로 즉각 옆집에 사는 사람과 통화하듯이 대화할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부산의 동네 아이들 사이에선 저 먼 강원도의 설악산을 유람 다녀온 대학생 ‘형아’가 존재한다는 전설이 우리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당시 설악산은 거의 우주 밖으로 여겨졌던 시절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통 털어 한 인간이 이런 변화를 겪고 수용하고 적응해 내었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야말로 天地(천지)가 開闢(개벽)한 것이고 桑田(상전)이 碧海(벽해)로 변한 셈이 아니겠는가!
(창밖을 보니 흰 눈이 내린다. 눈송이가 제법 된다. 눈 내리는 세상은 왜 고요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눈송이가 경물을 가리는 것은 시각적 정보이건만, 어찌 하여 조용하다는 청각적 인상을 주는 것일까?)
지난 50 년은 그저 질풍이었고 노도였다. 대변혁이었다. 거의 모든 가치 기준이 의심을 받았고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빌빌대던 사람이 어느덧 떵떵거리는 졸부가 되기도 했고, 많이 배우고 교양을 갖춘 자가 영락하기도 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좋은 학교를 다닌 자는 그저 그런 월급쟁이로 살고 있지만 시골에 남아 아무런 기대가 없던 친구는 이제 토지보상을 받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사람은 한양으로 말은 제주로 보내야 한다’던 오랜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엄청난 기회들이 눈앞에서 오고 갔으며, 우연히 기회를 붙잡은 자는 성공했고 기회를 붙잡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자는 실패했다.
혼란 그 자체였고 어디에도 기회가 있었던 시대, 지난 반세기의 세월은 이래야 한다고 하던 모든 기준들이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좀 된다 싶어 잽싸게 따라갔으나 어느새 끝물이었고, 아니다 싶어 버리고 쳐다 보지도 않았던 후미진 구석에선 화려한 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성공한 사람들은 물론 나름으로 성공의 원인이 있었겠지만, 실은 성공의 원인은 뒤에 와서 그렇게 이유를 찾는 것일 뿐 어쩌면 運七福三(운칠복삼)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 이 급변의 시대, 이 기회의 시대, 그리고 기회만큼이나 좌절의 시대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가질 것이고 품은 所懷(소회)가 저마다 다를 것임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우리 사회는 그 너무나도 흔하던 機會(기회)의 문이 급속도로 닫히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조차 너무나도 기회가 많았던 환경에서 이제 정상사회로 환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것인지조차 판단이 서질 않는다.
마치 시속 130 km 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시내로 들어와 80 Km로 달리면 기어 가는듯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듯이.
그저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난 반세기를 놓고 훗날의 역사가들은 엄청난 일련의 혁명적 변화의 시대였다고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시대를 생생하게 호흡하는 만큼이나 이 시대가 가져다 준 편견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모든 당대인들은 그 시대에 대해 盲目(맹목), 눈뜬 봉사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눈앞에 모든 디테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이는 환경에서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인사의 말씀 역시 지난 반세기를 놓고 어떤 엄밀한 평가를 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시대를 살았던 우리가 어떤 생각들을 저마다 가졌었나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충분하다고 여긴다.
다소 의식이 있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까닭으로 지난 반세기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가진 것 같다.
어떤 이는 천박한 졸부의 시대라고 여길 것이다.
또 만인이 만인에 대해 룰도 없이 경쟁한 야만의 시대라고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먼저 들이대고 들이미는 자가 최고인 시대로 말이다.
소탈하게 자연에서 얻는 것만으로 살지 않고 베이스가 없는 물질과 향락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이 시대를 저주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답던 산하가 툭 하면 개발과 경제 살리기의 명분 아래 멸실되고 있다고 안타깝게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근대 이후 무너져버린 겨레의 자긍심에 대한 반발로 이 시대를 타락한 시대로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親日(친일)의 잔당들이 기회를 선점하면서 부와 권력을 세습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또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민족 주체가 사라졌으니 이 모든 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면서 가난할망정 북쪽의 주체사상이 정말로 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 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에 의해 번영은 잠시일 뿐, 여전히 우리는 종속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가 아무리 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어도 그것은 민주를 짓밟은 유린행위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강개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의가 승리하고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질적 발전은 없고 오로지 투입과 물량을 통한 양적 발전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란도 있을 것이다.
그저 세상은 도둑질과 강도질, 사기가 판을 치고 횡행하며 그로서 돈과 권력을 쥐면 장땡인 세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자는 결국 손에 쥐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공포에 질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결국은 재벌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비관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다종다기한 비판론에 반해 지난 반세기를 긍정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별로 인기도 없고 호소력도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처럼 하나같이 일리가 있는 다양한 비판에 대해 호호당이 이 글을 통해 아니다, 그것은 지나침 또는 비관론 내지는 착각이라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에서 소개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한결같이 우리 모두에게 아프고도 심각한 상처, 좀처럼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끄럽든 창피하든 간에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점이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그간 대단히 잘 해왔기에 오늘날의 번영과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분명한 사실은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가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는 점만큼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부단히 썩고 부패해왔다면 오늘날의 번영과 풍요, 그리고 상당수의 보통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소박한 의문이기도 하다.
분명 혼란의 시대였고 혼돈된 가치의 시대였으며 저질이 득세했던 시대였지만, 그에 결코 못하지 않게 우리가 역동적으로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발전해왔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호호당의 말은 거친 시대였기에 하나하나 그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크게 ‘퉁’쳐서 크게 긍정할 수 있는 지난 반세기였다는 것이다.
수학에는 ‘대수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영어로는 law of great numbers 가 된다.
그간 우리가 이리저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혼란과 변화를 겪었지만, 주어진 결과는 ‘긍정적’이라는 얘기이다.
호호당이 지난 반세기를 비관하지 않고 긍정하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이제 다가오는 겨울은 반드시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소강기에 접어들게 되고 지난 반세기의 격동과 혼란에 대해 다소나마 거리를 두고 객관화할 수 있는 기간이라 보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눈 덮힌 겨울 벌판을 보며 지난 한 해의 농사를 반추해보듯이 그런 겨울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이다.
물론 겨울은 춥겠지만, 그 寒氣(한기)만큼 정신도 맑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겨울 동안 어떻게 사나요 하는 걱정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어차피 세상은 살아지기 마련인 것이니 말이다. 그보다는 지난 상처들을 돌보고 한편으로 스스로 지나쳤던 점들을 돌이켜 봄도 좋으리라 싶은 것이다.
그냥 겨울이 아니라 국운의 겨울이 시작되는 2009 년 기축년을 보내면서 드리는 또 하나의 인사, 送年(송년)이 아니라 送時代(송시대)의 인사로 받아주시면 고맙겠다.
격정의 시대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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