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아침, 적잖이 흐린 날씨. 그리고 거실.
잘 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네. (아내)
화이트든 블랙이든 뭔 상관. (남편)
아니 꼬부랑말? 언어 수나한다매! (아들)
수나가 뭐냐, 순화지, 짜샤, 꼬부랑말을 쓰든 꼬부린 말을 쓰든 이 순간부터 취소야.(애비)
와이또 구리스마스 반자이! 아, 나는 친일파. (개기는 아들)
그럼 당신은 친미파, 나는 막가파, 킬킬킬. (남편)
가족 간에 오간 짧은 대화 속에 우리 현실의 축소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데 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아내의 막연한 바람, 남편의 반사적인 애드립 본능, 아들의 딴지걸기와 애비의 공권력 행사, 친일과 친미 그리고 막가파적 이념들이 순식간에 오고 갔으니.
크리스마스지만 ‘놀이터’에 나와 아침에 오고간 가족 간의 대화를 되돌아보니, 문제의 발단은 나 자신이었다, 뭐 큰 문제도 아니었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라는 아내에게 정말, 그러면 좋겠네 하고 동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충동적으로 비튼 이유는 그 이전에 읽고 있던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라는 것을 놀이터에 나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용보다도 글쓰기 방식이 신경에 거슬려서 책으로부터 빠져나올 구실을 찾던 나에게 귓전에 들려온 아내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발언은 탈출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내의 말에 ‘화이트든 블랙이든’ 하면서 빈정댄 것은 그러니 아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던 책에 대한 나의 압축적 소감이었다.
나는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의 글을 쓰는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다지 큰 분량의 책이나 글이 아닌 경우에도 서양 학자들의 이름들은 어쩌면 그렇게 부단히 거명되고 또 그들의 말은 어쩌면 그리 지겹게도 인용되어야 하는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자크 라캉, 레비 스트로스, 미셀 푸코, 니체, 루이 알튀세, 발터 벤야민, 슬라보예 지젝, 소쉬르, 뒤르켐, 프로이트 등등.
이 사람들이 나오지 않으면 책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그들이 남긴 말과 글은 독창적인 면도 있고 신선한 구석도 있지만, 이들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거나 해석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서양인들은 그토록 명석하고 높은 차원의 생각을 하는가?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은 그저 굶주리거나 아니면 배부른 돼지밖에는 없는지 우리 지식인들의 글과 책에서는 오로지 그 서양 유명 스타들의 말들만 인용되고 강조된다.
그러다보니 우리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도 모두 그들이 사용했던 것을 번역한 어휘들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니 천편일률적인 말들로 책과 글이 채워진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다.
이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앞에서 거명한 사람들의 책을 과연 몇 권이나 읽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섣부른 것인지 모르지만 절대 대다수 독자들은 한 권의 책은커녕 이름조차 모를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더 정상이고 자연스럽다고 나는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 지식인들이 쏟아내는 책과 글 역시 外界(외계)인들의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나는 우리 지식인들의 책과 글에 대해 정말 짜증이 난다.
같은 시대와 공간에서 우리 보통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우리 지식인들이건만, 어째서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의 절실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알아듣고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말과 어휘로 얘기하지 않느냐 하는 불만이다.
다시 말해 저쪽 유명 스타들의 말, ‘꼬부린 말’은 제발 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부를 많이 해서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고 소화했다면 그것을 우리말로 알아듣게 얘기해주실 것이지 왜 그 유명스타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앵무새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하고 있는가 하는 불만이다.
사용하는 단어도 정말이지 지겹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뭐 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觀淫症(관음증)이라 한다.
관음증이란 남의 정사 장면을 몰래 지켜보면서 대리만족한다는 뜻인데, 우리가 살면서 그토록 색만 밝히면서 살고 있냐 말이다.
길에서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 그러면 그걸 넘겨다 보는 것은 人之常情(인지상정)인데, 툭하면 죄다 관음증으로 몰아버리니 프로이트가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바탕에 성욕을 깔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나서부터는 그저 보기만 하면 관음증이라 한다.
그러면 길을 가다 남의 집 담장 너머 핀 꽃을 바라봐도 관음증이니?
실로 생소한 말들, 그러나 지식인들의 책에서는 결코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들, 예를 들면 他者(타자), 他者化(타자화), 비유가 아니라 類比(유비), 잉여적 존재의 배제, 헤게모니, 담론도 아닌 담론 체계 등등 이제 이런 말들은 더 이상 듣기가 싫은데 지식인들이 쓴 책을 보면 거의 모든 글과 문장이 그런 단어들로 이어져가고 있으니 지겹다는 것이다.
고딩이 시절, 팝송 가사 많이 외우는 것이 급우들 사이에서 먹어주던 시절 얘기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서 인문학의 위기이니 하며 호들갑 피우고 있냐고요.
우리 지식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가?
운동권 계통의 지식인들은 혁명에 관한 서양 철학만 하는 사람들인가?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냐고 나는 묻고 싶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책방에 들렀다가 손찌검한 우리 지식인의 책을 잘못 읽고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속이 불편했다.
웬만하면 남을 비방하지 않는 호호당, 그저 체한 탓이라 양해해주시길.
어릴 적 ‘크리스마스 이부’라 하기에 그러면 ‘일부’는 크리스마스 전전날이고 크리스마스 날은 ‘삼부’인 것으로 이해했던 기억이 난다.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 (순 영어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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