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의 문화에 대해  _  2009.12.10
우리 사회가 민주 체제로 전환된 지 제법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서툰 면모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특히 의사결정의 모범을 보여야 할 우리의 議政(의정)활동을 보면 실로 낙제점에 머물고 있다.

우리 국회의원들이 두뇌가 유달리 떨어지는 것도 아닐 터인데, 왜 저래야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당연히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회의원들의 수준보다는 우리 사회의 문화 풍토가 그렇기 때문이다.  

민주 체제에서 의사를 결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多數決(다수결)이다. 토의를 거친 뒤 다수결로 의사를 정하기로 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토의를 지연 또는 방해하거나 또 다수결 진행을 방해하는 행동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 체제라고 해서 무조건 다수결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전 합의 조정을 통하는 방식도 있고 어떤 사항은 만장일치를 요구할 때도 있다.

우리 사회는 특히 합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에 대해 대단히 취약하다. 아직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서구 사람들은 합의 조정이나 타협 등에 있어 우리에 비해 대단히 능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타협과 조정을 하는가에 대해 그 대표적인 방법들을 약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방식은 back scratching 과 rog-rolling 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준다는 의미의 back scratching, 그리고 통나무 굴리기란 의미의 log-rolling이다.

합의를 하는데 있어 서로 상이한 주장에 대해 하나를 양보하고 상대편으로부터 하나를 양보 받으면서 진행하는 교환 방식이라 하겠다.

둘째 방식은 거짓 인질, false hostage 방식이다.

반드시 관철하고 싶은 내용이 있지만 상대가 합의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하자. 그럴 경우 상대가 내세운 주장 중에서 이쪽에서도 아무 이의나 반대가 없지만 반대하는 척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끌다가 그 안건은 합의해주고 정작 관철시키고자 했던 안건을 양보 받는 방식이다.

셋째 방식은 최소 공통분모 언어, lowest common denominator language 방식이다.

말이 길고 이상하지만 내용은 어렵지가 않다.

가령 한 쪽에서는 긴급하다고 주장하고 반대편에선 그저 그렇다고 여길 경우, 그 차이로 인해 결렬되기 보다는 일단 그 문제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한다’고 발표하는 방식이다. 얼핏 보면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정상 회담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 두 나라가 어떤 문제에 대해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든지 아니면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겉모습은 어떤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후에 계속 물밑 협상 채널을 열어두는 방식이다.

넷째 방식은 각주전쟁, footnote war 이다.

어떤 내용에 대해 합의를 했으나 실은 이런 저런 단서 조항들이 붙은 것을 말한다. 이는 우세한 의견이나 생각이 본문에 들어가고 소수 생각이나 온건한 반대 사항은 각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합의는 이루되 서로의 생각을 모두 반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공식 투표, unofficial vote 방식이 있다.

이는 합의 조정 방식임을 표방하면서도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할 경우 비공식적 투표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서구인들은 이런 식으로 합의를 도출해내는데 있어 우리보다 대단히 능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주고받기 식의 ‘deal’이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회도 실은 앞에서 말한 합의기법들을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소수당이 다수당과 상대해서 합의할 경우, 그 합의 내용은 어차피 다수당의 의견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소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나 단체들은 그 합의를 일종의 변절이나 배신행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반면 흥정과 협상을 인정하는 풍토를 가진 서구인들은 소수 세력일 경우 다수결 방식보다는 합의 조정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일방적 다수결 방식보다는 약간이라도 소수 의견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사전 토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소수의 의견이 반영된 합의가 이루어진 연후에 그것이 다수결로 통과되더라도 나름 그 결정이 최선이었음을 인정한다.

이런 점이 타협과 흥정을 기본으로 하는 서구 풍토와 ‘굽히지 않는 기개’와 ‘불변의 지조’를 더 멋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우리 문화와의 차이이다.

그러나 불굴의 기개와 불변의 지조는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에 있어 장애요인이 될 뿐이다. 그것은 과거 임금이 통치하던 시절에 임금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때로는 벌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던 시절의 얘기이다.

아직 우리사회는 왕조통치의 전통 문화가 의식의 근저에 여전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 正義(정의) 또는 正答(정답)은 다수결을 통하거나 합의조정으로 달성된다. 그렇기에 그 합의나 다수결에 따른 결정이 궁극적인 眞理(진리)라든가 正答(정답)은 아닐지언정, 생각을 달리하는 여러 사회 구성원들과 단체 간에 이루어진 最善(최선)의 것인 것이다.

‘똑똑한 독재’가 最上(최상)의 답안을 가져올 순 있지만, ‘무모하고 어리석은  독재’ 또한 最惡(최악)의 답안을 가져올 수 있기에, 우리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것이다.

가령 미디어 법을 놓고 한 편에선 걸레가 다 된 만신창이 법률이라 하고, 한 편에서 독재지배를 위한 음모라고 주장한다.

둘 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회적 正義(정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게 될 때 민주주의 문화는 ‘비로소’  정착이 될 것이다.

최근 우리의 국회상황을 지켜보다가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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