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_  2009.10.20
강원도를 다녀와 피곤이 가시질 않았다. 거의 점심 무렵 사무실로 나왔고, 이 글을 쓴다.  

사무실로 나오는 길목에 고속도로 옆 제방도로를 지나게 된다. 잘 조경된 산책로를 한 쌍의 노부부가 걸어가고 있었다.

등산모를 쓴 백발의 할아버지와 그 조금 뒤편에 할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또 한 손으로 지팡이로 받치면서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가 따라 걷고 있었다.

노부부만 사는 가정, 집안 여기저기에 약 봉지들이 가득하고 조금 어두운 실내 광경이 눈앞을 스친다. 갑자기 날이 차가워지니 더 차가워지기 전 건강을 위해 노부부는 의욕을 내어 불편한 몸을 끌고 산책길에 나오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놀랍고 희한하다. 순간에 스쳐가는 일이지만 노부부에 대해 많은 점들을 어림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아온 경험 때문이기도 하리라.

아침 뉴스 시간에 소개되었던 다큐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이 그 노부부의 이미지 위에 겹쳐진다.  

영화 장면에서는 할아버지가 불편한 소와 함께 걷고 있었고, 현실에선 할아버지가 불편한 할머니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이미지는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행복의 순간들이도 하다.  

빛나는 영광의 순간들만 삶의 행복이라 한다면, 우리 삶은 너무 밑지는 장사일 것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소와 함께 언덕을 오르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슬픔이기도 하겠지만, 현재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기도 한 것이다.

노부부 중에 어느 쪽이 먼저 가실지 모르지만, 불편한 몸이라도 끌어주고 매달리면서 함께 걸을 수 있는 저 순간이 어찌 행복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차안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어깨 너머로 ‘북망산천’이 보였지만, 그 광경은 슬픔이었고 또 행복이었다.

그렇다, 悲哀(비애)는 행복이기도 하다.

아침 시간 ‘또복이’ 배를 만져주니 좋아서 묘한 呻吟(신음)을 낸다. 그 소리에 ‘봉이’가 질세라 얼른 달려와서 내 무릎에 자신의 등을 비벼 댄다. 모두 한 때 버려졌던 강아지들이고, 지금은 내 무릎, 그러니 膝下(슬하)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

‘가을이’를 쳐다보니 ‘올드독’답게 질투를 내지 않고 그저 발치에서 지켜봐준다.

강아지 아빠인 나도 행복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그리고 식물이건 돌봐주고 돌봄을 받음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돌보는 이 행복하고 돌봄을 받는 이 행복한 것이다.

그대는 불행한가?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진실로 그대가 돌봄을 받지 못하는 존재라 한다 해도, 꼭 불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대가 허약해도 그대가 돌볼 수 있는 생명들은 주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니, 그 생명을 찾아서 돌보아주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가다보면 어느 날엔가 그대를 돌보겠다는 생명과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 그러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고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올랐다. 시인은 여전히 내게 있어 꽃인가 보다, 잊지 않고 있으니. 여기에 시를 옮겨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