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육과 서태지  _  2009.10.16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이것은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의 시작 부분이다.

나는 서태지를 우리 한국사회와 특히 교육에 있어 한 마리의 까마귀였다고 생각한다.

까마귀가 울면 초상이 난다 해서 시골 어른들은 꺼려한다.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까마귀는 영리한 새, 초상집의 음식 만드는 냄새를 가장 먼저 맡고 날아와서 喪家(상가) 주변에 포진한 다음 다른 새들이 오지 못하도록 울어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태지를 나는 까마귀로 본다. 서태지의 노랫말과 음악 속에는 우리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1992 壬申(임신)년에 데뷔했다. 그리고 그 해부터 우리사회는 급속도로 ‘物質化(물질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해 말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물질화. 대략 무슨 말인지 아실 것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은 ‘근면성실’과 ‘근검절약’을 美德(미덕)으로 삼아왔다.  

동시에 이 시점은 문민정부의 탄생처럼 민주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민의를 대표하는 제도인 대의민주주의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당연히 장단점을 가진다.

민주화란 본질적으로 권력과 권위의 분산을 의미하고, 중앙으로 뭉치게 하는 求心力(구심력)의 이완을 가져오기 때문에 또한 예전에 보지 못한 많은 문제점들을 만들어낸다.

우리정치가 워낙 오랫동안 민주화를 외쳐오다 보니 마치 민주화가 절대의 가치인양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지금까지의 어떤 제도보다 상대적으로 장점이 많다는 것이지, 至高至善(지고지선)의 제도는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언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민주주의 환경 속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모두 달성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우리사회는 물질 풍요 시대와 민주 시대에 대해 ‘초보운전자’인 셈이다.

자동차 초보운전이야 한 3 년 정도 지나면 능숙하게 운전하게 되지만, 사회적 경험과 가치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30 년은 지나야 틀이 잡히고 정착단계로 들어설 수 있는 법이다.

흔히 하는 말로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고 결정은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나 사회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야당이던 한나라당도 그렇고 지금의 야당인 민주당은 지극히 비민주적이지 않은가.  

야당의 존재 의의가 반대에 있다고 한다면 이유 있는 항변을 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서 이유 있는 항변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수결로 정해졌다면 싹싹하게 수긍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틀인 것이다.

야당이 소수일 경우 문제점에 대해 指摘(지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한계인 것이지 의사당에서 쇼를 연출해선 안 되는 것이다.  

이제 교육에 대해 얘기를 하자.

1992 壬申(임신)년부터 우리사회의 교육 제도 역시 민주화의 길을 감과 동시에 물질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개천의 용'은 모두 환경오염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 무렵부터 대학교육을 이수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희소성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92 학번의 특징은 대학에서 그치지 않고 상당수가 대학원이나 박사 학위를 위한 상급 코스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질적 풍요의 뒷받침으로 하여 해외유학이 급증했다.

사실상 92 학번부터 대학교육의 사회적 효용가치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7 년 외환위기가 생겨나고 그 이후 글로벌 스탠다드란 것이 유행하면서 미국 가서 MBA를 이수하지 않은 상경계 출신은 출신 대학에 관계없이 거의 賤出(천출) 취급을 받기 시작했지 않은가.  

그로부터 이상한 말들이 생겨났다. 한쪽에선 이공계의 위기라고 했고, 또 한쪽에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남는 것은 법대와 의대인 셈이고 아무리 ‘로 스쿨’ 등으로 인원을 늘려도 모든 학생이 법대와 의대만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1992 년으로부터 다시 10 년이 지난 2002 년 학번, 이른바 ‘이해찬 세대’부터는 대학의 효용가치란 것이 본질가치는 없고 그저 대학을 나오지 않았을 경우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불이익’을 상쇄한다는 정도에 머물게 되었다.

(사실 이해찬 당시 장관만의 책임은 아니기에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이번 역시 1997 년 외환위기와 같이 10 년 만에 미국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취업률은 더 형편이 어려워졌다.

돌이켜보면 1977 년도 학번, 이른바 뺑뺑이 세대, 그 대상자가 1958 년생이었기에 흔히들 하는 말로 ‘58 년 개띠’로 불리는 그들이 우리 대학교육의 변곡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학교육의 사회적 효용, 쉽게 말하면 출세의 발판으로서의 대학교육은 77 학번부터 곡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30 년 뒤인 2007 년 학번에 와서 최저점, 다시 말해 바닥을 치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72 - 81 학번부터 절대적이던 대학의 효용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변곡점은 77 학번이었다.

82 - 91 학번부터 대학의 효용가치는 아쉽지만 그런대로 인정해줄 수 정도는 되었다.

92 - 01 학번부터는 대학의 효용가치는 거의 사라지고 석박사를 위한 발판 정도로 인식되었다. 특히 97 학번부터는 석박사는 기본이 되었다.

02 - 11 학번까지는 대학은 아무 소용이 없고, 특히 07 학번이 취업할 무렵이 되면 참담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 예측한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끝에 ‘2’가 오는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하면 그 해는 壬(임)이란 글자가 붙는 해이고, 壬水(임수)는 우리 사회의 지도원리와 교육의 변화를 상징하는 코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서태지의 말은 옳았던 것이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라고 외치던  서태지는 대학을 가지 않았고 대중음악으로 성공을 했다.

물질화의 시대는 개성의 시대를 의미하는 바, 개성을 살려 제도권 교육을 포기하고 애당초 대중음악으로 들어선 서태지는 크게 성공했으니 스스로 모범을 보인 셈이다.

1992 년은 물질화가 급격하게 가속된 시점이니, 우리 대중음악 역시 그 풍조가 크게 변해갔다. 물질 이전의 음악과 물질 이후의 음악을 나눈 것 역시 서태지였다.

자신이야 몰랐을 것이고, 지금도 모르고 있겠지만 서태지야말로 시대가 나은 스타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대중음악계는 상당히 재미가 있다.  

한편에서는 70-80 음악이 제법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한편에서는 2007 년부터 ‘원더걸스’로 시작된 반복 멜로디의 ‘노바디’ 풍이 한창이라는 점이다.

노바디, nobody, 무슨 뜻일까? 숙제로 남긴다.

한 가지 더, 이제 지난 수십년간 우리사회를 지배해오던 대학교육에 대한 熱氣(열기)는 식어드는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동산의 실패와 대학의 효용가치 없음은 우리사회를 장차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동산이던 부동산이 다시 부동산이 되고, 대학은 다시 학문의 전당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 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