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반성의 때, 그러고 나면...  _  2009.9.15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자에게 아무리 바다가 이러니저러니 한들 바다를 알려줄 수 없다. 간접경험과 지식의 한계라 하겠다.

나는 사람을 反省(반성) 이전인 사람과 반성 이후인 사람으로 구분한다. 우리는 살면서 부단히 반성하게 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반성이란 운명학적 개념이다.

그러니 먼저 내가 말하는 반성이란 어떤 것인지 부터 말하기로 한다.

삶에는 週期(주기), 오름과 내림이 존재한다는 것이 운명학의 전제이고, 그 주기는 오름과 내림을 합쳐 60 년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나는 그간의 연구를 통해 그 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수히 확인했고, 나아가서 2007 년 무렵에는 그 주기를 면밀하게 추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

더 알게 되자 상담이 어려워졌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말해주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 그저 힘든 자에게는 위로나 격려의 말 또 의기양양한 사람이면 약간 눌러주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는 상담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정답만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음을 충분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관식 수학문제를 채점할 때 선생은 도중에 풀어가는 식을 보고 채점을 한다. 식이 훌륭하면 마지막의 해답이 틀렸어도 점수를 준다. 운명의 정답만을 알려주는 것도 이와 비슷해서 해답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다시 돌아와서 얘기를 하면, 내가 말하는 반성이란 내림 30 년 중에서 28-29 년차에 맞이하는 반성을 의미한다.

사람의 수명이 오늘날 80 년이라 할 때, 그런 반성의 시기는 한 번 혹은 두 번을 거치게 되지만 나이 관계로 충분한 각성을 갖는 반성은 한 번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반성의 시기에서 우리는 지난 모든 삶의 과정을 되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문제점을 깊이 통찰하게 된다.

스스로 정말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만, 그것이 열등감은 아니다.

열등감과 자만심은 모두 이 반성의 때를 거치지 않은 자만이 갖는 심리적 상태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해 열등감은 자만심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고 반성 이전의 일이다.  

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자신을 객관화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지하면 그 바탕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뿐 부족함을 열등감으로 내재화시키지는 않게 된다.

이런 운명적 반성을 거친 이의 말과 행동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많이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반성 이전의 사람과 반성 이후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반성을 하고 나면 곧 바로 운명의 바닥점에 도달한다.

바닥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그 뒤의 흐름은 오름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그 오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을 거치면서 알게 된 것들, 배우게 된 사실들에서 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런 반성의 때가 있었다. 운명학에 대한 연구와 내공보다도 그런 시기를 경험했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일생에 한 번 있는 반성의 때를 거쳤다고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생긴 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큰 자산이 된다는 것을 말함이다.

가령 내 그릇은 어느 정도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됨으로서 이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지 또 어디에 쓸 수 있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자신의 분수, 즉 제 몫을 알게 되고 제 몫을 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삶에서의 모든 재앙은 그릇이 채워지지 않는데 있지 않고 넘쳐날 때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릇의 크기를 안다는 것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얘기라서 우리는 사실 자신의 그릇을 알지 못하고 산다. 하지만 삶에서 단 한 번 있는 반성의 때를 맞이하면 대충이라도 알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반성의 시기를 거쳐 바닥을 치고 일어나기 시작할 때의 경우에 관한 것이다.

일생을 통해 가장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기는 반성으로부터 7 년차, 그리고 정신의 바닥으로부터 5 년차에 온다는 것이다.

반성도 많이 했고 정신도 차렸는데 현실은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그로부터 모든 일들이 좋아지게 될 것으로 여긴다. 일반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기존의 흐름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니 어느 시기가 되어 스스로가 그 흐름을 되돌려놓을 때까지 악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2000 년에 반성을 했다면 2002 년쯤 바닥을 치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재운은 2006년에 가장 어렵고 한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증시에 응용해도 좋다. 약간 설명하면 이렇다.

어떤 종목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고 하자. 함부로 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이럴 경우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회사 경영진이다. 그리고 문제점에 대한 반성을 하고 조금 지나 대처방안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주가는 계속 하락을 거듭한다.  

그 기업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매수에 나서보지만 주가는 더 떨어진다. 그러면 기업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라 여기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이기 위해 다시 팔아버리게 된다.

그러면 바닥이 나온다. 바닥이란 ‘지나치게’ 하락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나치게 하락을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악재가 있지 않나 조심하면서 좀 더 상황을 기다려보게 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때가 바닥인 것이다.

바닥이 나왔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는 이미 문제점에 대한 대책을 실시하면서 맹렬히 일어서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증시 바닥은 이미 그 기업이 소생하고 있는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인생의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가령 지금 당신이 이렇게까지 몰락하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힘든 경지에 처해있다고 한다면 사실 당신의 운세는 상승세로 돌아서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이제 오름세로 돌아섰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의 터널이라 여겨진다면 실은 그 터널의 말미 부근에 도달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이다.

대개의 경우 가장 한심한 경지에서 2 년만 지나면 기대치도 않았던 일들과 인연을 통해 어느덧 소생의 기미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삶은 그 속에 스스로 놀라운 복원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니,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먼 옛날 윌리엄 홀덴과 제니퍼 존스가 출연했던 영화, 노래로도 널리 알려진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이란 노래가 생각난다. 그처럼 우리의 삶도 실로 대단한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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