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앙노무스키, 시앙노무스키(Xiangnomuski)!
때 이른 봄기운에 비 촉촉 대지를 적시어 응당 기분이 좋아야할 터인데 저놈의 짝퉁 심판 때문에 기분 완전 잡치고 나온 작업실, 공기 축축 기분 눅눅.
1만 미터 빙속에서 금 하나 건진 걸로 퉁치고 싶어도 그거야 상대가 스스로 그런 것이고 이거야 그게 아니니 도무지 갈음이 되질 않는다.
오십 중반의 나름 냉철한 호호당도 분함을 참을 수 없으니, 젊은 친구들이야 얼마나 열 받고 있으랴.
어제 연아 경기를 보고 기분이 룰루루 좋아져서 하늘의 여신 누트에 비긴 그림을 오픈 다이어리에 올리고, 내친 김에 화창한 여름 강변에서 즐기는 그림으로 대문마저 개비했건만 자고나니 이거 웬일! 시앙노무스키!
저 심판, 수사에 쓰는 프로파일링을 해봐야 한다. 분명 우리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 가볍고 즐거운 책 어디 없나 살피니 ‘반지의 제왕’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반지의 주인’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한 제목이다.
나는 이 책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다, 어디를 펼쳐야 내가 좋아하는 글과 노래가 있는가를.
먼저 즐기는 노래의 일부를 옮긴다.
태양이 없던 시절,
빛나는 그녀의 손으로 심은 별들이여!
이제 맑고 환한 바람 부는 들판에서
우리는 그대의 은빛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나니!
오, 엘베레스! 길도니엘!
이역만리 숲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네,
서쪽 바다 위 그대의 별빛을!
O stars that in the Sunless Year
With shining hand by her were sown,
In windy fields now bright and clear
We see your silver blossom blown!
O Elbereth! Gilthoniel!
We still remember, we who dwell
In this far land beneath the trees,
Thy starlight on the Western Seas.
이 노래는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가지고 처음 길을 떠났을 때 숲속에서 만났던 요정들의 노래 후반이다.
엘베레스는 별의 여왕이고 길도니엘은 하늘 穹窿(궁륭)에 촛불처럼 별을 밝히는 자라는 뜻으로서 엘베레스의 별칭이다.
프로도 일행은 요정들과 밤늦도록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대화한다. 프로도는 요정의 하나인 길도르와 대화하면서 궁금하고 걱정되는 것을 물어보지만 좀처럼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하자 프로도는 이렇게 반문한다.
“이런 말도 있지요, 요정들에게 조언을 구하지 말라. 그들은 예스와 노를 동시에 말하니까.” (Go not to the Elves for counsel, for they will say both no and yes.)
재미있지 않은가! 조언을 구했는데 ‘예스’와 ‘노’를 동시에 듣게 된다면 말이다. 나는 많은 사람을 상대로 인생의 일을 놓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에스와 노를 함께 말해준 적이 많았다. 앞일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도 일종의 엘프인 셈이다.
프로도의 불만어린 말에 길도르는 웃으며 대꾸한다.
“그런가요? 요정들은 솔직한 충고는 하지 않지요. 충고란 위험한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서로 지혜를 나누는 경우에도 그렇지요. 모든 길은 언제나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Is it indeed? Elves seldom give unguarded advice, for advice is a dangerous gift, even from the wise to the wise, and all courses may run ill.)
솔직한 충고는 바로 경솔한 충고이기 쉽다. 그러니 그런 속내를 다 드러내는 충고나 조언은 위험한 까닭에 賢者(현자)사이에서도 하지 않는 법이라 한다.
작가 톨킨은 영국인이니 이 대사는 속내를 잘 밝히지 않는 영국인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어설픈 충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그리고 모든 길은 언제나 어긋나기 마련이라는 말 역시 그렇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의 생각대로 이어져 가는 일을 살면서 보았는가? 일은 그런 것이다. 길도 그런 것이다.
예상이나 생각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운명은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출발할 때 목적지는 어차피 정하고 떠나는 것이지만, 사실 어디에 가서 당도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 그저 동서남북만 너무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반지의 제왕과 처음 만난 때를 가만히 되짚어보니 1994 년이었다.
그 때 나는 다니던 은행을 무작정 그만 두고 중국을 돌아다니다가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무렵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홍콩에 머물고 있었다. 쓸쓸히 길을 걷는데 책방 앞 가판대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큰 소리로 세일을 하고 있었다. 별 기대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잠도 자지 못하고 푹 빠져서 읽었다.
심취해서 읽다보니 영어 독해 실력도 엄청 늘었다. 평이한 문장 그러나 빛나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책은 유머로 가득한 모험담이지만, 도처에 수많은 지혜를 숨긴 환타지 소설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요정 길도르로부터 충분한 답을 얻지 못한 프로도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어디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그러자 길도르는 답한다. “용기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얻어집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영어 본문을 옮기면 이렇다. "Courage is found in un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장소에서 용기를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실로 훌륭하다! 프로도가 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외부의 도움이나 구체적인 보장이 아니라는 점, 그저 험한 길을 가는 데 있어 끝까지 굴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용기를 구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훌륭하다.
상담을 하면서 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데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어떤 고생이나 역경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 그러면 나는 웃으며 얘기해 주었다. 거야 당연하지요, 보장만 된다면 누군들 모험을 회피하겠습니까!
속으로 내가 말해주고 싶었던 이런 것이었다.
용기를 가질 수 없다면 길을 떠나지 말아야지요. 용기라는 것은 이런 때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길을 떠나보시지요, 된다는 보장 같은 것은 세상 어디에도 주어지지 않는 법이니 말입니다.
다만 길을 가다보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당신의 길을 안내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고 또 용기와 의욕을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길을 떠나야만 그런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냥 망설이면서 고개 너머 길을 넘겨다본들 보일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용기란 길을 가다보면 얻게 되는 물건이라는 것을 톨킨은 친절한 어투로 내게 일러주었다.
당시 나는 무턱대고 사표를 내고 중국말 좀 한다는 것 하나만을 믿고 낯선 중국대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딜 가도 어떤 분야에서도 아이고, 이제 오십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하는 블루 오션은 없었다. 많이 외로웠지만,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와 같은 톨킨의 글을 읽으며 크게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 나는 프로도야, 샘 갬기와 같은 충복은 없지만 내 스스로 프로도도 하고 갬기도 하면서 길을 가자. 길을 가다보면 unlikely place에서 용기도 얻게 될 것이고 또 지혜의 스승 갠달프를 만나든지 아니면 내가 갠달프가 되든지 그렇게 되는 거 아니겠어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삶을 하나의 모험담으로 꾸며보자. 그리고 여정이 끝나면 돌아와서 ‘그래 나 이제 돌아왔어, Well, I'm back’ 하고 일기장을 마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먼 未知(미지)의 길을 갈 때는 우선적으로 용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자야 한다는 점이다.
반지의 제왕 1권 3장 ‘Three is company' 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프로도는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젠 눈을 좀 붙여야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요정은 그를 피핀 옆의 나무 밑으로 데려갔고, 그는 잠자리에 몸을 던지자마자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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