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려면 아부도 서슴치 말아야 하리라.  _  2009.11.12
되돌아보고 돌이켜보는 戌月(술월)이 지나니 문득문득 올 한 해의 일들을 새겨보게 된다. 원래 이런 일은 세밑에 하는 것이라 하면 빠른 감도 들지만.

한 번 정리해보기로 한다.

올 해, 늘 기쁨의 원천이었던 토끼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버려졌던  강아지 두 마리가 새롭게 집에 들어왔고, 열 하고도 세 마리의 낭만 고양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희희락락호호당’ 블로그를 4월 청명절에 시작해서 많은 글을 썼다.  

또 제자들과 함께 청명에는 쌍계사, 하지에는 경주 석굴암과 감포 해변, 상강에는 내린 천 미산계곡에 숨겨진 秘境(비경)을 다녀왔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상담을 그만 두었기에 경제적으로는 적자였다. 블로그 바람에 ‘증시’라는 바다낚시에 소홀했던 것도 적자의 원인이었다.

음양오행과 명리 강좌로 새롭게 많은 사람들과 만난 것 역시 큰 수확이었고, 올 초부터 古典(고전)강독을 한 것도 나름 수확이었다.

새롭게 읽은 책 120 여권, 300 여장의 그림, 400 컷 정도의 사진, 대충 이런 정도가 올 해의 수확이었다. 책이나 그림, 사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생각들과 자연의 풍광, 마음의 풍경들이 소중한 것이라 하겠다.

담배로 인한 기관지 증세와 작년부터 식사를 등한시한 죄로 얻은 위장병으로 지금 열심히 치료 중이지만, 고생 좀 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것들이 제법 된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점입가경이랄까.

마지막으로 이건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얘기라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지만, 지리산 칠불사에 갔다가 문수보살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열해놓고 나니 제법 얻은 것들이 있구나 싶다.  

이렇게 개인의 일을 나열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이런 식으로 결산을 한 번 해보라는 권유의 차원이다.  

한 해의 처음에 비추어 그 한 해가 끝날 무렵에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전쟁과 평화’라는 대하소설을 남긴 톨스토이의 말이다.

나 역시 어느 때부터인가 한 해 단위로 결산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더 심한 편이다. 사람은 한 해를 한 평생처럼 느끼며 살아야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다. 그래야만 정말로 생을 마감하는 때가 되어도 이런저런 아쉬움 이 없이 담담하게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한 해 단위로 결산을 하고 정산을 하다 보니 연말이면 치르게 되는 나만의 儀式(의식)이 하나 있어 소개할 까 한다.

冬至(동지)는 가장 해가 짧은 날이다. 사실상 동지가 한 해의 죽음이고 그 다음 날이 새로운 한 해의 부활이다.

동지가 되기 전 날 밤,  나는 동해안 낙산사의 ‘홍련암’을 찾아간다.

서울을 떠나 찾아갈 때 나는 임종을 앞둔 사람의 마음이 된다. 한 해의 결산이 아니라 一平生(일평생)을 결산하면서 간다.

숙연한 마음으로 찾아간다. 죽으러 가기 때문이다. 낙산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홍련암에 도달하면 바로 그 때가 죽음의 시각이 된다.

어느새 무거워지고 뻑뻑해진 나의 헌 삶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려놓고 나면 가볍다. 정말로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그런 마음이길 빌어본다.


내 삶을 내려놓은 뒤, 아무도 없는 암자에 들어 건물 전체로 공명하는 파도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더러 신도들이 단체로 와서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바깥에서 어두운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성대기도 한다.

그 시간은 실로 묘한 시간이다.

동지 다음 날 해가 뜨는 시각까지 나는 죽음과 새로운 부활의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기간인 中有(중유)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묘한 세계 속에서 새 해를 맞이한다.

동쪽 바다에서 해가 솟기 시작하면 나는 또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다.

기지개를 펴고,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으로 새로운 생명을 점화한다. 새로운 내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확인하게 된다, 한해살이 새로운 생명, 나는 풀처럼 한해살이 생명인 것이다. 내 나이, 만 54 세이니 나는 쉰 하고도 네 번의 생을 살아왔음을 확인하게 되고 또 다시 쉰 하고도 다섯 번째 삶을 시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몸 역시 중년의 쓰던 몸이 아니라, 중년의 몸을 새로 얻었음이다.

포맷까지는 아니지만, 이니셜 부팅, IPL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늙은 몸이지만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그 활력은 서쪽 수평선 너머에서 몸을 사른 후 아침이면 동녘 하늘에서 새롭게 비상해오는 불사조의 그것이다. 그렇다, 나는 진정 불사조이고 세 발 달린 三足烏(삼족오)인 것이다.

올해 동지 前夜(전야)에도 물론 찾아갈 것이다. 죽으러 갈 것이고, 동지 아침이면 새로운 생명을 찾아서 되돌아 올 것이다.

내가 이런 한 해 단위의 죽음과 부활의 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나름 사연이 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하는 평범한 생각이 단초였다.  

살다보면 그 삶이 구차하고 버거워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누구나 가지기 마련이다. 내 다시 태어나면 이런 바보 같은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누구나 가지기 마련이다.  

나도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반드시 다음 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풀처럼 한 해 단위로 살면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지난해까지의 모든 내 삶의 권리와 부채 중에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털어버릴 것은 모두 털어버리고 새롭게 삶을 얻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살아오면서 얻고 만나고 느낀 것이 얼마인데, 그것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느니 그것들에 바탕을 두고 새롭게 살아가기 시작하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올해까지의 삶이 누추하고 구차했다고 치자. 온통 빚투성이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이라고 하자.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으리! 한 해의 새로운 삶이 그런 바탕 위에서 시작할지언정 한 해의 마지막에 가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발견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 아닌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다음 생을 기다릴 것 없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가서 헌 해와 함께 죽고 새 해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삶의 방식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冬至(동지)의 儀式(의식)을 치르다보니 이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 해를 잘 살아가려면, 동지 전날 밤 죽음의 장소와 시각에 가서 아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으려면 결국 하루를 잘 사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기 전 얼마의 시간 동안 하루의 일들을 돌이켜보고 새겨보고 다음 날 하루가 창조적인 시간들로 메워지기를 기도하고, 또 생생한 하루의 시간을 내가 만들어갈 것을 새롭게 결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로 매일 그렇게 하려면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습관을 만드는 일이다.

습관이 되면 매일 하게 된다. 하지 않았을 때 마음이 편치 않으면 습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전 기도 약발을 잘 듣게 하려면, 아무래도 좀 ‘바치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귀가시간 집으로 오르는 길목을 지키던 고양이들에게 주던 밥을 매일 주게 되었다. 이 또한 습관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고양이들에게 주는 매일의 供養(공양)은 고양이들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다. 自利(자리)하고 利他(이타)한 행위이다.

물론 고양이들에게 주는 그 공양은 고양이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마을의 ‘터주님’들에게 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한 해를 잘 살아가기 위해 천지간에 가득한 모든 신령과 존재들에게 갖은 아부를 다 떨고 있는 ‘아첨장이’인 셈이다.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바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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