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麗(화려)한 슬픔의 날에  _  2009.11.8
비가 지난밤부터 휴일 오후까지 이어지고 있다, 입동이 어제였으니 겨울비라 해야 하겠다.

겨울비하면 김종서가 즉각 생각이 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 비오는 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생활의 없어선 안 될 별스런 맛이 아닌가? 더욱 그것이 겨울비라면.

이렇게 포근한 입동은 처음 맞이한 것 같다.

물론 입동은 겨울이 아니라, 늦가을이라 해야 맞다. 설 立(립)과 겨울 冬(동)이니 겨울의 기운이 언 듯 비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니 늦가을이다. 진짜 겨울은 입동으로부터 15 일이 지난 이 달 22 일 小雪(소설)부터이다.

자연과 계절은 이처럼 친절하다. 겨울의 시작을 보름 전에 미리 알려주고 있으니.

늦은 아점을 먹고 사무실로 나오는 차 속에서 가로를 보았다.

짙은 홍갈색의 단풍 사이로 강아지와 함께 산책에 나선 아저씨의 모습, 가볍게 공기를 가르며 조깅을 즐기는 젊은 청년의 모습, 차로까지 나와 뒹굴고 있는 젖은 낙엽들, 스산한 겨울 대기와 간간히 듣는 빗방울, 음울한 표정으로 땅으로 깔리고 있는 잿빛의 구름들.

더 없이 화려한 늦가을의 情趣(정취)였다. 아마도 2009 년의 마지막 늦가을을 장식하는 광경이리라 여기니 내 눈은 그것들을 가슴에 담기 위해 열심히 쫓아다녔다.

나는 내 삶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모든 풍경들과 이미지들, 인연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광경을 본 적 없고, 같은 사람을 본 적 없으며, 같은 사람 속에서도 같은 모습 본 적 없으니 같은 사랑을 한 적도 없다.

같은 사람이란 생각은 관념일 뿐, 그 사람은 부단히 다른 사람이란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여기는 나.

그러니 내 삶의 앞을 스치는 모든 것들을 붙잡을 놓을 순 없기에 적어도 기억해두고자 애를 쓰는 행위들로 나의 삶은 채워지고 있다.

붙잡을 순 없기에 기억한다는 것, 이 생각 사이에는 아쉽다는 감정이 끼어들고 있다. 붙잡을 수 없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붙잡을 수 없으니 아쉽고 그래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인 아쉬운가 하고. 답은 간단하다. 내 삶이 아쉽다는 말이다.

왜 아쉬운가? 주어진 삶과 시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 수 없기에 그 동안이라도 삶을 잘 누려야 하는 것이다. 설사 영원히 산다 해도 지금과 같은 존재의 樣態(양태)로서 살 수는 없는 것이기에 삶을 아끼고 잘 누려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그런 기억들의 단편들과 그 외부의 것들이 내 속에 들어와 촉발시키는 또 다른 것들을 불규칙하게 늘어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드시 서정적인 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과 가치에 대한 글도 결국은 한 사람의 체험적 총체로부터 무관하지 않을 것이니 글이란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표현행위가 아닐까? 늘 해보곤 하는 생각이다.

글이란 쓸수록 더 고독해지는 행위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이고.

어떻게 한 작가의 글에 대해 수십만 수백만의 독자가 공감하고 호응을 할까? 그것이 나는 진정 미스테리하기만 하다.

개인적인 부분은 실로 공유할 수 없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베스트 셀러 작가들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쓴 글 속에 작가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어쩌면 시대상황의 진수가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스며들었기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나에겐 풀 수 없는 의문이란 얘기이다.

그런 의문은 그만 두고 내가 글을 쓰는 까닭,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결국 다름 아니라 글쓰기 역시 삶의 일부로서 내가 내 삶을 아끼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밖을 보니 그런대로 비가 그치고 있다.

겨울은 슬퍼야 하는 것일까?

만물이 시드는 계절이니 말이다.

시드는 것은 슬픈 것일까?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것일까?

앞서 나는 입동 지난 늦가을의 ‘화려한 정취’라는 표현을 했다.

붉은 단풍은 지는 말라비틀어진 낙엽의 색조 변화일 뿐이다. 그런데 왜 아름답고 또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차가워지는 계절에 붉은 색은 precious, 고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직관적 설명이다.

그런데 잎새가 枯死(고사)되어 ‘미라’가 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런 고귀한 색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자연의 神秘(신비)이다.

어떻게 색을 분별하는 우리 인간이 늦가을에는 붉은 색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저런 대단한 서비스를 베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던 것일까?

화려하다, 늦가을의 거리는. 그러나 이 화려한 情調(정조)는 앞서처럼 만물이 시들어 가는 슬픔과 상치된다. 아니면 슬픔 역시 화려함을 수용하는 것일까?

잠시 엇갈리는 생각들로 혼란스럽다.

그냥 정리하기로 하자. 슬픔이란 삶을 아끼기 때문이고, 그 슬픔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은 장식 없이 그 자체로서 더 없는 화려함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2009 년 입동 하루 지난 늦가을, 비 내린 오후의 정취는 화려한 슬픔이었다고 기억해둔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