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먼 길을 방황해야 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삶은 하나의 實驗(실험)이었다.
어렸을 때 머리를 쓰다듬으며 들려주시던 한결같은 말씀들이 기억난다, 다음에 크면 좋은 사람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잘 살아야 한다. 그러나 머리가 커져가면서 나는 그 말씀들이 싫었던 것 같다. 너무나 평범하게만 들려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말씀들이 너무나 허무하게만 생각되었다.
그 정도야 누구나 태어난 이상 다 하는 거 아냐? 정말 산다는 것이 그 정도가 전부라면 너무나 시시하고 별 볼일 없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나는 그 祝福(축복)을 거부했다.
서른 후반의 어느 날 밤이었다.
야, 이거 이대로 직장이나 다니면서 가족 먹여 살리다 보면 세월 가고 나이 들어 죽을 터인데, 정말 죽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진짜로 후회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보니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던 적이 있다.
초조함이었다.
그래서 덜컥 사표를 내고 어려서부터의 ‘환타지’였던 중국으로 떠났다, 실크로드와 돈황의 천불동, 티베트 라싸의 포달랍 궁을 찾아서. 그곳에 가면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목적지인 라싸의 포달랍 궁을 가지 않았다. 얼마 전 ‘가보지 말아야 하는 아련한 곳 그리고 길’이란 제목의 글이 그것이다.
그리고 많은 방황을 했다. 1994 년에 시작된 방황은 2000 년 말에 와서 경제적 빈곤과 함께 좌절로 끝이 났다.
그간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의 동굴’을 찾아 나섰다. 나만의 동굴 속에서 상처를 핥고 빨다보면 방황이 가져다 준 상처를 요양하고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블로그에 올려진 365 회에 달하는 ‘김태규 명리학’ 글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기에 앞서 내가 나를 치료하는 글이었다.
삶은 어쩜 그렇게 내가 그토록 무수히 읽었던 무협지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무협지에 보면 자기 나름의 高手(고수)가 강호에 나가 까불다가 ‘세상’이라는 진짜 고수를 만나 치료하기 힘든 內傷(내상)을 입고 박살이 난 후, 인적 없는 窮僻(궁벽)진 산을 찾아가 동굴 속에서 요양하는 과정이 나온다.
영락없는 나였다.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면 그냥 동굴 속에서 명상이나 하면서 남은 삶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약 중에서 가장 뛰어난 名藥(명약)인 ‘세월’의 약효는 역시 어김이 없었다.
요양에 들어간 지 6 년이 지난 2006 년 말이 되자 그간의 상처는 간 곳 없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2007 丁亥(정해)년을 맞이했다. 내 생일의 干支(간지)가 丁亥(정해)이니 마치 생일과도 같았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다음에 크면 좋은 사람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잘 살아야 한다'는 명제야말로 삶의 절대 명제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된 것이었다.
한 때 허무주의로 여겨졌던 그 말을 이제는 진심어린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이제 어느 때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마리 토끼가 모두 내 품안에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왜 나는 이런 먼 길을 돌아다니면서 방황했던 것일까 하고 다시 물어보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컸던 것이 문제였다. 너무나도 ‘나’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 나에 비하면 세상은 너무나도 ‘하챦은’ 것이었다. 나와 세상이 무게를 견주면 당연히 내가 더 무겁다고 여긴 것이었다.
많은 방황과 그 결말로서의 좌절은 ‘내’가 ‘세상’에 비하면 너무나도 값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아픈 반성이었다.
내 무게를 1 이라 하고 세상의 무게를 n 이라 했을 때 1/n 은 그 답이 ‘제로’라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동굴 속에서 상처를 핥고 빨다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비교하고 겨누는 것이야말로 진짜 바보들이나 하는 짓거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나와 세상을 대립되고 견주는 무엇으로 파악하면 해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양치질을 하면서 거울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중력의 무게로 인해 그 남자의 얼굴 가죽은 아래로 쳐져 있었고, 세월의 풍상이 가져다 준 지울 수 없는 흔적들로 가득했다. 앞머리를 들쳐보니 어느 새 半白(반백)이었다.
저 남자는 분명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데 그렇다면 누구인가?
누구세요?
저 남자는 분명 ‘나’이긴 한 모양인데 어쩜 저리도 누추할까?
안녕하세요, 힘드시죠?
그러다가 홀연 깨달았다.
거울에 비친 그 늙다리 남자는 '나'이기도 하지만 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 ‘내’가 보고 싶으면 거울 앞에 설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따라 변해가면서도 언제나 변함이 없는 내 눈앞의 저 세상을 ‘나’로 여기기로 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그곳에 비친 자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 내 눈앞에 펼쳐진 저 세상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저 세상이자 동시에 ‘나’이기도 한 저것은 시간의 시금석에 관계없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그렇게도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不滅(불멸)의 세상이요 나인 것이다.
그랬다, 개체로서의 ‘나’는 언제 죽어도 죽을 몸이요, 또 마땅히 사라져줘야 할 것이다. 낡은 것이 치움을 당해줘야 그 장소에 새것들이 들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가을에 낙엽이 떨어져야만 새봄에 푸른 새싹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런 이치이고 또 자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잎사귀’로서의 ‘나’를 떠나기로 했다. 잎사귀가 아니라 나무 자체가 되기로 했고, 나무를 떠나 해와 달과 함께 영원히 저기에 자리할 세상과 하나가 되기로 했다.
개체인 내가 사라진다? 슬픈 일이기는 하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하지만 세상과 하나인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세상 속에 녹아들어 구분 없으니 구분 없는 그대로 영원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세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자기최면술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자기기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진정한 방법을 알려드린다.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대립이 되는 객체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처음에는 ‘나’인 양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나’인지 세상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사랑하다보면 어느새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있을 것이다.
세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나 또한 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죽을 때의 후회 같은 공포 망상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한 때 치료용 동굴이었던 작업실은 이제 내 놀이터가 되었다. 해피 엔딩이다.
(이 글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솔직한 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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