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페어 레이디, 원래는 뮤지컬, 그리고 영화로도 큰 흥행을 했다.
청초 미인 ‘오드리 햅번’이 출연한 영화는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검색해보니 1964 년 영화였다. 국내에서도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했다.
나중에 나는 이 영화가 영국의 ‘버나드 쇼’가 쓴 ‘피그말리온’이라는 희곡을 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글이나 말로만 듣던 버나드 쇼를 만나게 되었고 또 熱(열)독자가 되기도 했다.
버나드 쇼의 희극을 읽다보면 미국 뉴욕의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우디 알렌’을 연상시킨다.
무진장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탭댄스처럼 경쾌하게 밟고 지나가는 우디 알렌의 코미디는 언제 봐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버나드 쇼는 사회주의자, 우디 알렌은 좌파이다. 그 바탕에는 스토아 철학이 깔려있어 내 취향에 딱 맞는 좌파들이다.
사람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천하를 다 주어도 내 손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긴 老子(노자)나 대자연과 함께 노닐자고 주장한 莊子(장자)야말로 주류나 비주류를 벗어난 外流(외류)였다. 나는 그분들의 제자이다.
며칠 전 교보문고 아울렛 할인 매대에서 책을 한 권 샀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대해 버나드 쇼가 자기 나름의 해설을 붙인 책이었다. 1898 년에 썼으니 무려 112 년이나 된 책이다. 번역을 한 사람은 ‘유향란’이란 분이었다.
얼마나 번역을 매끄럽게 잘 해놓았는지 마치 버나드 쇼가 한글로 책을 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유향란’이란 이름을 검색했다. (야, 영어 번역 기 막히네 싶으니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생긴다. 게다가 ‘여성’이라니 말이다, 나는 남성이고. 이런 거 사실 은근 바람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았더니 이 분이 번역한 책을 이미 몇권 사서 읽은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눈속의 독수리’란 소설의 번역자도 바로 이 분이었다.
로마제국이 권력 다툼과 종교적 혼란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한 장군의 얘기를 다룬 소설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바탕이 되기도 했던 소설이다.
‘글래디에이터’는 흥행에 성공한 영화지만 사실 나는 재미가 없었다. 초반부 전쟁 장면은 대단한 압권이었지만, 뒷부분은 사실 멜로 드라마에 불과했기에 실망했던 영화였다, 나는 그런 영화를 이미 평생 동안 너무도 많이 봤던 까닭이다.
특히 실망한 이유는 ‘글래디에이터’가 어릴 적에 감동 깊게 보았던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그 방식이 내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도 있다. (1964 년 작품이라 되어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잘 생긴 스티븐 보이드와 입술 큰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였고, 장중한 맛이 있었는데 글래디에이터는 가벼웠다.
사실 글래디에이터의 원조 격인 영화는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스파르타쿠스’이다. 1960 년 영화이고 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보았다.
최근 스파르타쿠스가 다시 시리즈물로 제작되었지만 향수를 깰 것 같아 보지 않고 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어릴 적 우리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엄청 화제가 되었다. 그 바람에 로마 병사의 칼을 흉내 낸 목검을 만들어 전쟁놀이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사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영화였다. 아무리 반군이 신출귀몰하게 잘 싸우고 스파르타쿠스의 지도력이 뛰어나도 결국 정규군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지울 수 없는 인상으로 남았던 것이다.
내가 권위조의 아버지에게 덤벼들어봤자 이길 수가 없다, 밥을 주지 않고 집밖으로 내쫓으면 어쩔 수 없이 치사하게 타협하고 반성의 빛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알게 해 준 영화였다. 당시 나는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반항하다가 한 대 맞았던 기억이 있다.
스파르타쿠스와 함께 내가 광분했던 영화가 있었으니 당시 제목은 ‘스파르타 총공격’이란 영화였다. 1962 년 영화이고 원제는 ‘The 300 Spartans’이란 것을 검색해보니 알았다.
애니메이션 영화 ‘300’의 원조격인 영화이다.
당시 어린 나는 스파르타쿠스와 스파르타가 같은 이름인 줄 알았고, 가보니 전혀 다른 무대와 스토리였다. 그러나 엄청나게 광분할 정도로 그 영화를 즐겼다. 한 몇 달 동안 나는 방구석에 들어박혀 공상하면서 스파르타 군의 용맹성을 즐겼고 그림으로도 엄청 많이 그렸다. 방패가 ‘역 V’ 자 형태였던 것이 인상 깊다.
내가 어려서부터 세계역사에 관해 흥미를 가지게 된 동기도 실은 이 영화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다. 새로운 발견이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무렵, 책방에서 제법 비싼 책을 어머니에게 졸라서 샀는데 제목이 ‘이야기 세계사’ 두 권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 바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 얘기, 특히 용맹한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가 테르모필레란 곳에서 300 용사를 이끌고 싸우는 장면도 소개되고 있었다.
‘앗, 역사책이란 이토록 엄청나게 재미난 이야기 천지구나’ 하고 느꼈다.
책을 읽다가 발음이 잘 되지 않는 지명이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헬레스폰토’ 해협이었는데, 그걸 어머니에게 읽어보라 했더니 유창하게 ‘헤레스뽄또’라고 읽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평생 그 순간을 어머니가 가장 유식해보였던 순간으로 간직하고 있다. ‘와, 울 엄마, 외국말 발음이 엄청 좋은데’ 하면서 감탄했다. 특히 ‘폰토’를 ‘뽄또’라 발음하는 부분에서 그 묘한 소리가 내 귀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사실 나는 최근 들어 영화에 대한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영화이건만 오래 살다보니 옛날에 나왔던 영화들이 조금씩 바꿔가면서 다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리메이크라 하겠는데 그 방식이 예전보다 더 열등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이 나를 영화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 때문에 더 스펙타클해지고 있지만, 동시에 내용 전개는 더 후져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말로 ‘찌질’해진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나이가 든 탓이거니 하는 마음도 있다. ‘고마 해라 마니 무따 아이가’처럼 나도 이제 지나치게 많이 영화를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2005 년 책방에서 옛날 책들이 양장본으로 또 그림도 더 많이 들어가 화려해지고는 있지만 결국 그 책이 그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우울해했다.
이제 내가 즐겁게 읽어볼 책이 없단 말인가? 하는 생각, 세상 모든 지식을 머리에 담은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 비슷한 우울증 같은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저 우울증이었다.
그러니 영화도 우울증으로 끝이 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릴 적, 영화가 시작될 때의 그 가슴 떨림은 이제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사랑에 첫눈을 뜰 때의 사춘기 소년과도 같았던 그 떨림은 이제 사라져버린 것이다. 역시 오래 살긴 했나 보다.
어릴 적에는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 연달아 보여주는 이른바 ‘맛배기’들도 정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맛배기를 예고편이라 한다는 사실은 훨씬 커서 알게 되었다.)
아마도 오랜 산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