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아쉬워도 굳이 다 채우지 아니하고, 좀 남아도 끝까지 다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中庸(중용)의 정신은 그 어떤 것이든 지나친 確信(확신) 또는 過信(과신)이 위험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인류의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용의 철학이 우리 생활에 반영된 결과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 바로 ‘적당히’이다.
適當(적당)하다는 말은 數値(수치)로 나타냄을 거부하는 말이다.
‘적당’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정확하다’는 뜻이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의미는 ‘정확하지는 않아도 그 언저리 근처’라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약간의 여유와 오차를 인정하는 개념, 약간의 오차 범위를 허용하는 말로 쓰인다.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하나요? 하고 제자가 물었을 때 ‘응, 적당히 넣어야지’가 요리 스승의 대답이다.
술자리가 잦은 남편에게 아내가 ‘여보, 술 좀 적당히 드세요’라 말하기도 한다.
굳이 정확하려고 들지 않고 그 언저리면 된다는 우리의 생활태도 속에는 中庸(중용)의 정신과 철학이 배어있는 것이다.
즐거운 일도 그렇다. 즐겁다고 해서 그 즐거움을 100 % 까지 그러니까 끝을 볼 때까지 누리지 않고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 파하는 것 또한 중용의 정신이고 생활의 지혜이다. 지나치면 누군가가 酒邪(주사)를 부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정조 임금은 과녁에 화살을 모두 맞히자 마지막 한 발은 일부러 허공으로 날림으로써 스스로 지나침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겉멋부림’이 아니라 중용이었다.
사실 중용의 정신은 동아시아 세계만의 정신은 아니다.
고대 로마 제국 시절 그 곳에도 존재하던 생활 철학이었다.
스토아 철학이 바로 그렇다.
스토아 철학에서 강조된 바, 필로소피아,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이 말은 지혜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기술, ars vivendi 를 강조했다.
또 그런 기술을 습득한 사람을 현인(賢人)이라 했으며, 현인의 지혜란 결국 사람은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명상록’을 보면 우리에게 친근한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 마치 老子(노자)나 孔子(공자)가 쓴 책이 아닌가 싶었다.
스토아 철학은 그러나 그 이후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마치 이상한 금욕주의 철학인양 치부되었지만, 중세 스콜라 철학의 바탕 속에는 바로 이 스토아 철학이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를 두고 逆說(역설)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역설이 아니다. 옳고 좋은 것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둔다. ‘옳고 좋은 것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서구의 경우, 중세 교권시대를 거치면서 반발이 일어났고 이에 인간 스스로의 판단력을 믿는 흐름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데카르트’였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合理主義(합리주의) 또는 理性主義(이성주의)라 불려졌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또한 그리스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
합리주의는 비합리적이거나 우연적인 것, 동시에 감각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理性)이나 논리(論理)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성에 의해 틀림이 없고 건전한 기본적인 원리로부터 모순이 없이 체계적으로 논리를 전개해 가는 합리주의철학이 등장하였다. 이는 사실 동아시아의 경우 良知(양지)를 중시했던 왕수인의 陽明學(양명학)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되는 사상의 흐름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나중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그리고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서구 철학의 주류로 등장했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근대로 들어오면서 기술적 발전과 생산력의 증대를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되었지만, 동시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점들을 낳게 되었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얻은 서구인들은 이성적 논리의 힘을 모든 방면에 적용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사회철학에도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구인들은 교회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神(신)에 대해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말이 그것이다.
신이 죽어버린 세상, 그러나 인간이 가진 건전한 오성과 이성이 있으니 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세상과 인간을 改造(개조)할 수도 있다는 엄청난 자신감은 이윽고 急進主義(급진주의)를 낳았다.
맑시즘을 비롯한 수많은 급진적 사회철학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근거 없는 우상들을 타파하고 나면 그야말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대였고 희망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기술발전, 특히 군사력의 우위로 인해 서구가 나머지 세계, 미개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도편달하고 따라서 지배해도 된다는 자신감은 인종주의적 편견을 강화시키면서 마침내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이어졌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과 투쟁은 따지고 보면 서구 합리주의가 낳은 두 쌍생아간의 대립이었던 것이고 온 세계를 어느 주장이 더 옳고 합리적인가를 테스트하는 일대 시험장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결국 20 세기 초반 유럽 열강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두 차례에 걸친 엄청난 전쟁과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펼쳤던 그 수줍고 조심스러운 주장들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정황이 얽혀 들면서 합리주의에 대한 서구인들의 자신감과 過信(과신)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怪物(괴물)로 둔갑해갔던 것이다.
이 괴물의 이름은 ‘근대 서구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이다.
합리주의로부터 시작된 흐름은 과학과 기술의 엄청난 진보를 가능케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인류는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은 서구인들이 온 인류에게 베푼 공로라 하겠다.
하지만 동시에 ‘근대 서구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라는 怪物(괴물)을 온 인류에게 안겨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 괴물의 정신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그만 둘 이유가 논리적으로 없다면 계속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만 둘 이유가 생길 때까지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경제학 원론에서 배웠던 바, 기업의 생산은 한계비용(MC)과 한계수익(MR)이 같아질 때까지 지속해야 한다는 이론과 동일하다. (경제학에 대한 기초이해가 없으신 분들은 이 말을 무시하고 넘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동시에 끝을 봐야만 그만 둔다는 정신 자세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 둘 이유가 없어 보여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에서 적당히 그치는 중용의 정신이 아니라, 그만 둘 이유가 없다면 끝까지 지속하는 것이 더 옳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자칫 사람으로 하여금 極端(극단)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끝을 보겠다는 자세는 진취적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極端(극단)을 본다는 것은 현실을 끔찍한 惡夢(악몽)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인류는 끔찍한 악몽을 겪었다.
양차 대전을 통한 전례 없는 희생이고 동시에 스탈린은 사회주의 실험을 통해 개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 사람들을 처리(?)했으니 그 숫자가 무려 전체 국민의 1/3 이었다. 우리 역시 6.25 전쟁을 통해 동족상잔의 慘禍(참화)를 입었다.
理性(이성)에 바탕을 둔 論理(논리)를 맹신하거나 과신하는 자야말로 가장 잔인할 수 있음을 우리는 현실에서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20 세기를 두고 에릭 홉스봄은 極端의 時代(시대)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하나의 옳은 전제에서 시작해서 그 중간에 논리적 오류가 개재된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로 인해 도출되는 결론은 옳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자세가 바로 논리적 극단주의이고, 동시에 가장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극단주의라 하겠다.
과학자들은 논리적으로 옳다 싶을 때 그것을 假說(가설)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가설을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 과연 그런 가를 확인한다.
그러나 그 실험을 현실 사회에서 한다면 그로 인한 부작용과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 즉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돌아온다. 그런데도 이른바 사회주의 철학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사회 개조를 위한 실험을 감행했던 것이고 거대자본들은 자본 자체의 논리에 끌려 세상을 하나의 市場(시장)으로 테스트했던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 무엇이든 極端(극단)에까지 미치는 것은 極端(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고 그 결과가 천국보다는 지옥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은 革命(혁명)을 좋아한다. 그러나 혁명이란 말은 그 자체로서 極端(극단)을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굳이 쓴다면 혁명이 아니라 進化(진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온건주의자라 하겠다. 더 정확히는 中庸(중용)의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 하겠다.
다음 글에서는 현실 세상에서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는 중용의 정신과 합리주의가 어떤 식으로 타협하고 그를 통해 보다 좋은 삶과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모색해보는 기회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또 비? 이제 나는 비소식이 지겹다. 뭐든 지나친 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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