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몸 세상에 맡길 밖에  _  2009.4.9
엄마의 머플러를 망토로, 못 쓰게 된 비닐우산을 보검으로 삼아 두 눈을 부릅뜨고 ‘비야 내려라, 천둥아 쳐라, 바람아 불어라, 이제 정의의 칼을 높이 들 때가 왔다’고 외치면서 이불 장 위에서 힘차게 뛰어내리던 사내아이는 간 곳이 없다.

아침 세면대 거울에서 마주하는 저 중년의 남자, 눈 아래가 작년보다 더 쳐졌고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은 저 남자는 옛날 그 천둥벌거숭이였음이 분명한 데.

그래, 긍정적으로 바라봐야지, 이제 남산 위의 저 늙고 푸른 솔을 닮아가고 있다고. 오래 된 것은 모두 靈物(영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저 남자 또한 그러하겠지.

오랜 세월 동안 꿈을 좇아 여기 저기 돌아다녔다. 올 때 대책 없이 왔음에도 여태껏 잘 먹고 살고 있으니 먼저는 부모님의 은공이고 크게는 세상이 이 한 몸을 돌보았음이라.

마흔 직전 덜컥 직장을 떠난 이래, 적지 않은 辛苦(신고)를 겪어야 했지만 이제껏 무려 16 년간 굶지 않고 살고 있으니 세상은 사물을 함부로 저버리지 않음이 분명하다.

野人(야인), ‘들의 사람’이 된 이래 깨친 것은 단 한 가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내 능력의 문제가 아니더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생명들은 살기 위해 앞을 다투고 곁의 것을 밀쳐내기도 한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인상만을 새기는 자는 자연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서로 협력도 하고 더러는 스스로를 버리고 남을 살리기도 한다.

나의 삶을 위해 남의 삶을 앗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 삶을 주기도 한다.

삶과 죽음을 나누면서 이어져가는 것이니 그것으로서 調和(조화)이다.  

조화라고 했지만 내가 장차 사느냐 또는 죽느냐,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느냐 아니면 다른 생명에 의해 삶을 앗기느냐 하는 문제는 개체 또는 개인에게 있어 큰일 중에 큰일.

그런데 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내 능력 안에 있음이 아니고 자연이 결정한다는 것이 그간의 깨침이다.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과 무능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내가 고민할 사항이 아닌 까닭에 사는 날까지 맘 편하게 살자는 깨침이다.

여기 풀 한포기가 있다. 햇빛이 내리고 비가 내리니 그것으로서 풀은 살아간다. 곁의 다른 풀포기가 그 빛을 가리면 그 빛을 되찾고자 몸을 구부려 빛의 방향을 좇는 것은 풀의 의지이고 생명력이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비 내리지 않는다면 풀은 결국 시들 것이고 곁의 풀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 상태가 몇 해만 거듭되면 불모의 땅이 될 것이고, 수십년 거듭되면 어언 사막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명 자체의 의지나 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빛을 더 받고자 경쟁하는 인근의 풀, 그러니까 라이벌들도 실은 라이벌이 아닌 것이다. 모두 한 배를 타고 있었던 셈이다.

자연에 있어 내 한 목숨은 사실 풀 한 포기와 같다는 생각이다.  

자연은 위대하고 또 두려운 그 무엇이다. 그러니 敬畏(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도 하나의 커다란 풀밭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비치고 비가 내리는 동안 풀포기끼리 서로 다툴지언정 전체로서는 살아갈만한 곳이 분명하다.

그러나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의 이 풍요로운 풀밭이 불모의 땅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런 날도 분명 다가올 것이다.

길게 보면 인류의 역사도 종말을 맞는 날이 올 것이며, 지구상 모든 생명이 사라지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원래 無(무)에서 왔으니 무로 돌아가는 것이 어차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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