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과 도--'도' 시리즈 제1회  _  2009.4.7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 한다. 음양 그 자체는 도가 아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게 하는 까닭이 도이다. (一陰一陽之謂道, 道非陰陽也, 所以一陰一陽道也)

중국 송대의 신유학자들, 나중에 성리학자라 불리게 된 사람들은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이 말에 근거하여 道(도)란 무엇인가를 궁리했었다.

원래 道(도)라는 말을 삶의 궁극적 깨달음이란 의미로 처음 소개한 이는 老子(노자)였다. 천지자연의 무한한 작용과 그 이치를 뭐라 형용할 길이 없으니 그냥 ‘도’라 부르고자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자의 ‘도’가 어찌 되었든 큰 인기를 끌었고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여러 가르침들도 덩달아 이 ‘도’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다른 사상체계를 지닌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에 대해서도 佛道(불도)라는 말을 쓸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에서 인용한 주역 계사전의 말속에 나오는 ‘도’ 역시 그런 영향의 결과라 하겠다.

다시 앞서의 말을 쉽게 얘기해보자. 한 번 음했다가 한 번 양한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다. 봄이 오면 나중에 가을이 온다는 말이기도 하며 한 번 흥하면 나중에 쇠할 때가 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세상에 리듬이나 물결이 있다는 말인 것이다. 무척 직관적인 말이어서 인생을 조금 살다보면 누구나 느끼는 말이다. 해안에 가보면 썰물과 밀물이 번갈아 들 듯이.

옛날 사람들이 그처럼 왜 그런 리듬이 존재하는 것일까에 대해 무척이나 연구했으리라. 인간이란 가만히 놔두면 궁리하는 존재이기에.

왜 밀물이 들었다가 썰물이 드는 것일까? 왜 봄이 오면 나중에 가을로 변하는 것일까? 저 현상의 배후에 숨어 눈앞의 현상을 만들어가는 힘 또는 원리 내지는 이치는 무엇일까?

인류의 지혜가 발전하면서 처음에는 그 배후에 있는 존재를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여 神(신)이라 하기도 했었고, 하늘이라 하기도 했다.

처음에 하늘 역시 인간과 동일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서 파악하고 그 하늘을 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그 하늘이 인격적 존재, 다시 말해 감정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무엇인가 추상적 존재 또는 하나의 원리로서 하늘을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감정을 지닌 하늘이라면 아무래도 偏愛(편애)가 있을 것이고 순간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며, 더러는 난처한 경지에 몰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축구시합, 국가간 대항전에서 서로마다 같은 하느님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진지하긴 해도 한편 웃음도 나오듯이 말이다.

하느님이 어떤 나라를 이기게 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사람들은 하늘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 원리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계사전에서 ‘一陰一陽’하게 만드는 것이 ‘도’라는 말도 이런 얘기인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저 배후에 있는 그 무엇 내지는 원리를 도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송대의 신유학자들이 계사전을 통해 규정했던 ‘도’는 사실상 이미 실체가 밝혀져 있다고 하겠다. 액면 그대로 그들이 의미했던 바의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무나도 답하기 쉽다.

계절이 변해가는 이치는 여러분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23.5 도 기울어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돌아오는 주기를 우리는 1 년이라 한다.  

기울어져 있지 않다면 계절은 없을 것이고, 태양을 돌지 않으면 역시 계절은 없을 것이다. 기울어진 지구의 태양 공전이 계절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의 실체인 것이다.

드는 물과 나가는 물의 이치 역시 간단하다.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 작용일 뿐이지 않는가.

낮과 밤으로 해서 일음일양인데 그 역시 지구의 자전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송대의 대학자들이 궁금해 했던 ‘도’는 그것만의 문제라면 이미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다.

주돈이나 장재, 정호와 정이, 신유학을 개척한 네 사람의 궁금증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말끔하게 해명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천지자연을 운행케 하는 도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체의 논리 정연한 이론체계를 세웠으니 그것이 신유학이고 성리학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도를 신비화했고 그 신비화에서 주어지는 경건함과 신성함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의 대강을 세웠으니 사실 근거가 없거나 심지어는 소설을 쓴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들이 궁금해 했던 도의 실체가 이미 밝혀졌다 해서 그들이 세운 성리학의 체계, 삶의 길을 밝힌 말씀들까지 한 숨에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학자들이 논쟁하고 궁리하면서 다듬어낸 철학과 윤리, 삶의 길에 대한 그들의 얘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장차 ‘도’라는 주제를 놓고 많은 얘기를 하고자 한다.

이전페이지로    목록보기            이 글 담아가기